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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인 인물 조명-이명직 목사(5)직접 전도에 총력을 기울인 성결교회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09.04.08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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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직접 전도에 총력을 기울인 성결교회


 한국성결교회는 전도방식에 있어서 동양선교회의 선교방식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동양선교회의 선교방식을 한마디로 말하자면‘신앙선교’라고 할 수 있다.‘ 신앙선교’라는 것은 어떤 교파의 선교부에 의해 파송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만 출발했다는 것을 강조한다. 동양선교회는 그 초기부터 지금까지 자기들을 하나의 신앙선교단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박명수 교수는 이들이 이처럼 모험적으로 선교를 진행한 원인으로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긴박성과 성령의 역사를 들고 있다. 전천년설에 기인한 재림의 긴박성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결교회 헌법은 그리스도의 재림이“친히 천년왕국 이전에”이루어지며, 이 재림은 성도를 위한 공중 재림과 세상의 심판을 위한 지상 재림으로 구분된다고 보고 있다. 그러므로 성결교회의 재림사상은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국성결교회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동양선교회의 재림론 역시 전천년설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그들에게서 신학을 배운 이명직의 재림론 역시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활천」에 실린 수많은 사설 중에서 직접 전도를 매우 독려하고 있다는 점이며, 이것을 주님의 재림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사회에 있어서나 종말론이 강력하게 대두되는 것은 그 사회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1930년대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는 일본의 대륙침략이 노골화되었으며, 경제적으로는 전세계적으로 몰아닥친 경제 공황의 여파가 한국성결교회 내에까지 침투하였다는 점이다. 즉 경제 공황의 여파로 동양선교회의 후원 기반인 미국 중부지역의 농촌지역이 타격을 받음에 따라 동양선교회 역시 모금 활동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으며, 이는 곧 한국성결교회로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192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일제에 의한 수탈로 인해 한국, 특히 한국의 농촌 지역은 황폐화되어 갔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장로교와 감리교에서는 이미 1928년에 그들의 총회에 농촌부를 상치시키고 있었으며, 1929년에는 YMCA에서「농촌청년」이라는 정기 간행물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성결 교회의 입장은 달랐다. 동일한 상황에서 한국성결교회는 종말론, 구체적으로는 현실에 부정적인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강조하며 직접전도에 매진했던 것이다.

“왜 직접 전도에 주력하지 않고, 유치원, 야학같은 결과도 없는 일에 노력하는 것은 전투력을 잃어버린 자의 일이다… 참 생명이 있는 교회는 싸우므로 지금까지 허공을 치는 역사를 그치고 직접 전도에 주력하라. 이단과 싸우라. 죄악과 싸우라”

 이명직은 타교단의 농촌계몽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 그는 당시의 시대를 위기의 시대, 재림이 가까운 시대로 보고 차라리 구령사업이 더 필요하고도 효과적인 사업이라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태한 날의 시작은 되었다. 지금은 곧 우리가 자다가 깰 때가 되었다. 보라. 지금은 전세계가 경제적으로 위태한 날이 되었다. 금일의 경제 공황은 한 나라에만 한한 것이 아니라 각 나라마다 적자보충 문제, 실업문제는 우리의 생활을 크게 위협하고 있다. 여기에 따라서 인심 곧 사상은 악화가 되어 무삼 주의가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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