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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이재정 목사의 하고 싶은 말(27)흔적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4.02.08 17:51
  • 호수 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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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목사(기성 복된교회)

별스럽지 않은 겨울을 지나는 동안에도 기상청이랑 아나운서가 몇 차례 대설 주의보를 내렸습니다. 나 사는 데는 그 말들이 늘 맹탕으로 흩어지고 말지요. 눈에 흠뻑 젖어보는 환상은 금세 실망으로 바뀌고 맙니다. 그래도 겨울 체면 살리느라 밤새 땅을 덮을 만큼은 내렸습니다. 기온은 영하 8도를 밑도는 데다 칼바람까지 부니 겁도 좀 나지만 내게는 ‘코스크’(코만 가리는 수제 마스크)와 방한모를 비롯한 비장의 무기들이 있습니다. 에스키모처럼 꽁꽁 싸매고 새벽 산책길을 나섭니다. 한참을 휘적거리며 걸으면 등에는 땀 배고 칼바람은 상쾌하게 느껴집니다. 생각은 맑고 깊어지지요. 늦게 열리는 겨울 아침 기다리는 새벽달이 떠 있으면 그 고즈넉한 청량감은 말로 다 설명이 안 됩니다. 우주의 다른 별을 걷는 것처럼 몽환적입니다. 깊은 사색은 우주 공간을 유영하는 하늘의 아버지 품에서 사람 사는 세상사로 명료하게 이어집니다. 말하자면 한 시간 산책길에서 꿈꾸다 깨기를 반복하는 겁니다. 어쩌면 그 달콤한 시간이 좋아서 새벽길을 나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간밤에 눈 내린 들판은 말갛게 닦은 칠판 같습니다. 그 맑은 칠판 위로 칼바람 지난 흔적이 날카롭습니다. 그것 말고도 의외로 많은 발자국들이 메시지로 남았습니다. 그중 흔한 건 들고양이 지난 자리입니다. 사람이랑 살던 집에서 쫓겨난 녀석이라면 칼바람 속에 남긴 흔적을 애처롭게 봐줘야겠습니다. 행여 가출해서 배고픈 자유를 누리는 녀석이라면 그 자유로운 영혼을 축복해 줘야겠지요. 섬찟한 건 들개 발자국입니다. 사람 발자국이랑 나란히 찍힌 개 발자국은 전에도 더러 보았습니다. 주인이 산책 데리고 나온 흔적이겠지만 홀로 지난 걸 보니 들개들도 제법 있는 모양입니다. 설핏 몽둥이 하나 들고 나서지 않은 걸 염려합니다. 나는 개가 무섭거든요. 개 발자국처럼 생겼지만, 발톱 흔적이 역력한 건 오소리 흔적으로 추측됩니다. 더러는 유제류(有蹄類) 발자국도 찍혔습니다. 너른 들판 어디 숨어 사는 고라니겠지요? 낮에도 더러 눈에 뜨이는 녀석들이니까요. 그런데 엄지손톱만 한 발굽 자국도 있으니 이 추운 겨울에 그 뾰족하게 어린 것을 어쩌면 좋아요! 

나 잠든 사이에 눈이 내렸고, 그 눈길 위로 여러 생명체들이 흔적을 남겼습니다. 칼바람이 눈 위에 남긴 흔적은 시간의 발자국이겠구요. 여상 나도 그 흔적들을 따라 발자국 만드는 중입니다. 관찰이 발자국에 닿으니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밤에 눈길 걷거든 함부로 발 딛지 말 것, 내 발자국 놓은 자리, 후대가 따라오나니, 私譯) 이라는 글귀가 떠오릅니다. 짐짓 장엄한 발걸음 만드느라 위풍당당 내디뎌 봅니다. 그래도 이미 발자국들에 마음 빼앗긴 발걸음이니 더 정성스레 간밤에 들판을 지난 흔적들을 탐구합니다. 개나 고양이처럼 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간 녀석이 있는가 하면 유제류들은 주로 길을 건넌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이 발자국들을 모두 모아다 오선지 위에 배열하면 상큼한 겨울 동요 한 편 넉넉히 될 듯합니다. 여하튼 생명체들 모두 이 냉혹한 겨울 들판에서 잘 살아남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해집니다. 그런데 그거 기도일까요?

그중 더 마음으로 드는 흔적이 있습니다. 가다가 멈춰 서서 망설인 흔적입니다. 한 자리에서 서너 바퀴를 돈 사연이 궁금합니다. 고양이 머뭇거린 흔적은 곰살맞습니다. 여리디여린 고라니 발자국이 멈춰서서 망설이다 간 자리는 거의 애처롭습니다. 다행히 망설였을 뿐 저항 흔적은 아닌 것으로 보아 포식자에게 당한 건 아닐 거라고 애써 우겨 놓습니다. 

한 시간을 휘감아 교회 마당에 닿았습니다. 뜻밖의 사람 발걸음이 예배당을 한 바퀴 돈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새벽예배 오시는 성도들이 차에서 내려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동선과 다른 발자국입니다. 인적 없는 앞뒤로 서성인 걸로 봐서 새벽 기도회에 다녀간 발자국은 분명 아닙니다. 제법 큼직한 남자 운동화 발자국입니다. 궁금해서 추적하니 예배당 정문에서 멈춰, 망설인 흔적을 남겼습니다. 들판의 서성인 흔적 못지않게 궁금합니다. 지난밤에 잠긴 예배당에 하나님 찾으러 왔다가 잠긴 문 앞에 돌아간 것으로 추측하면 정황이 꼭 맞습니다. 괜히 미안스럽습니다. 흔적들로 가득한 마당 눈을 쓸어 내면서 예배당 문이 아니라 마음으로 잠가 건 문 때문에 밖에서 서성이는 이가 있을지 염려를 여미고 여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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