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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無의 삶을 산 김용은 목사(24)조용기 신학생에 대한 미담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6.01 16:47
  • 호수 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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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은 목사

1957년 초 군산시교회연합회(회장 김용은 목사)에서 샘 토드 목사를 초청하여 학교 운동장에서 대규모 연합 집회를 열었다. 집회는 말씀과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들의 열기가 넘쳐 운동장이 좁아질 지경이었다. 이 집회의 통역은 조용기 신학생이었다. 샘 토드 목사가 통역하는 신학생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학생이 일평생 헌신하기로 하고 신학 공부하고 있는데 책상이 없다고 합니다. 하나님과 한국교회를 위해 큰일을 할 젊은이가 책상도 없이 공부한다니 말이 됩니까?” 그때 김 목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제가 마련해 주겠습니다!”


집회가 끝나자 곧 책상을 사줬다. 다음 집회 때 역시 샘 토드 목사가 설교하고 조용기 신학생이 통역을 담당했다. “하나님과 한국교회를 위해 큰일을 할 이 젊은이가 자전거가 없어서 통학하는 데 불편을 겪고 있습니다. 누가 이 친구를 위해 자전거를 구해주겠습니까?” 그곳에 모인 많은 사람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저요, 저요! 제가 하겠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자전거도 구해줬다. 그때는 똑똑하고 영어 잘하는 신실한 신학생으로만 알았을 뿐 나중에 그렇게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목사가 될 줄을 몰랐다. 나중에 대전 순복음교회 행상에 김 목사가 축사하는 시간에 ‘조용기 목사가 이렇게 세계적인 목사가 될 줄 알았더라면 그때 더 잘해주었을 것인데...’라고 농담하여 많은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김 목사는 젊은이들을 가능성의 세대로 보고 가능한 아낌 없이 돕고 베풀기를 좋아했다.


■ 생활 목회 그리고 가족
김용은 목사는 성도들의 삶에 들어가서 영혼을 돌보고 그들의 집과 건강, 심지어 부엌에 있는 숟가락까지 훤히 세고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그와 성도와의 관계가 밀착되어 있었다. 그는 생활 목회를 추구했다. 성도들의 생활 속으로 스며 들어가 성도들에게 생활 속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키게 하는 것이었다. 믿음이 생활화되어야 하듯이 목회도 생활화되어야 한다는 생각대로 목회했다. 그는 기도하고 성경 보는 날을 빼면 늘 성도를 찾아가 그들의 처지와 형편을 살피고 그들의 생활 속에서 느끼는 기쁨이나 슬픔, 아픔이나 고뇌를 같이 느끼기를 원했다.
그에게는 교회가 유일한 관심사였다. 평생을 교회를 떠나지 않고 살았다. 아픈 사람을 위해 기도해주고 집이 없는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살게 하고 쌀독이 빈집에는 쌀을 퍼다 주었다. 교회와 성도들이 아닌 다른 무엇에도 마음을 빼앗겨 본 적이 없었다. 총회장 시절에도 다른 지역으로 출장 갔다가 한밤중에라도 교회로 돌아와 새벽 기도회를 인도했다.
교회는 하나님이 주신 그의 기업이었다. 그에 반하여 가족들에게는 관심을 표현할 수 없었다. 아이들에게 자상한 아빠 노릇을 별로 해보지 못했고 아내에게 그다지 좋은 남편 노릇을 하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김 목사의 첫 번째 사모는 6·25 때 당한 고문으로 몸이 많이 약해진 상태에서 개척교회 섬기느라 고생하다가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 두 번째 사모도 고생을 많이 했다. 그는 교회로부터 최소한의 사례금만을 받았다. 그 사례비도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다가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운 가정에서 주고 선교비로 쓰곤 하였다. 사모는 집안의 살림과 아이들 교육을 도맡아서 했다. 이를 마련하기 위해 닭과 돼지도 기르고 염소를 치기도 하고 스테인리스 그릇 같은 것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팔기도 했다.
성도들의 곱지 않은 시선도 받았다. 돈이 없으면 빌리기도 하고 빌리다 보면 그 빌린 돈을 바로 갚지 못할 때 당하는 고통도 겪었다. 두 번째 사모도 가정을 잘 이끌었다. 참고 희생했다. 사모들의 마음속에 주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다는 마음이 있었기에 그런 희생이 가능했다. 김용은 목사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가장이 되자 동생들은 모친의 가르침대로 김 목사를 아버지처럼 대했다. 바로 밑의 동생은 6·25 때 순교했다. 둘째 동생은 작은아버지를 대신해서 감옥살이했고, 셋째 동생은 전주 태평교회를 섬기다가 은퇴했고 소천 된 후 시신 기증까지 했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훌륭한 목회자가 되었다. 넷째 여동생은 김용은 목사의 소원대로 남편이 목사가 되었다.
김 목사의 자녀는 8남매다. 아들과 딸이 각각 넷이다. 장남 김영곤 목사는 서울 오이교회에서 은퇴하였고 차남은 6·25 때 순교했다. 삼남 김헌곤 목사는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장을 지내다가 은퇴하였다. 첫째 딸은 소천하였고(사위: 최동렬 집사), 둘째 딸과 사위는 왕십리교회에서 반주자와 청년 교사로 섬기고 있다. 셋째 딸은 수원(김신정, 신영문)에서, 넷째 아들은 천호동(김양곤, 김연순)에서 넷째 딸은 독일(김신미, 허슬기)에서 살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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