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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평론 / 정재우 목사복수와 부활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4.13 21:37
  • 호수 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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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성결교회 원로, 가족행복학교 대표

시대상을 한 마디로 정의하기 쉽지 않지만 그 시대 문화의 흐름을 가름해 볼 수는 있다. 갈수록 문화의 흐름이 이상기류로 흘러가고 있어 걱정이 된다. 대중문화의 꽃이라 일컫는 드라마와 영화, 뮤지컬계에서 복수극을 소재로 다루는 작품이 쏟아지고 있어서다. 학폭 복수극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더 글로리”의 영향이 컸다.

선의의 피해자들이 더 이상 당하고 있지는 않겠다는 생각으로 벌어지는 복수극에 대중은 박수를 보낸다. 대리만족이라는 심리적 효과를 제대로 누린다. 큰 틀에서 본다면 소설의 권선징악 장르에 매료되고 있다. 악인을 철저하게 징벌하고 무고한 피해자가 승리를 거두는 결말에 희열을 느낀다. 여기에서 우리는 멈추어 서고 만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예술은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들거나 행복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한 편의 소설이나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가 우리를 감동에 빠지게 하고 더 고상한 심성과 세계관을 갖게 해준다. 선한 의지와 따뜻한 마음을 키워 준다. 인간관계의 성장과 희망을 선사한다. 그러나 요즘 대중문화를 움직이는 요소들이 변하고 있다. 더 상업주의로 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복수극으로만 치닫는 현상은 문제가 있다. 학폭 가해자들은 왜 철저하게 반성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사죄를 받지 못할까? 아빠 찬스를 사용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진정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인가? 자신이 옳지 않았지만 영원히 숨길 수만 있다면 자연히 잊혀질 거라 생각했을까? 그토록 긴 절망의 감옥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해 극단적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던 피해자의 마음을 왜 헤아리지 못한 것일까?

러시아의 세계적인 문호 톨스토이는 그의 소설 “부활”에서 한 가닥 희망을 노래했다. 인간의 회심과 사죄와 세계관의 변화를 보여준다. 귀족 네흐류도프가 젊은 날 저지른 패륜으로 청순하고 순박한 하녀 카츄사의 삶을 수렁으로 빠뜨렸다. 카츄사는 윤락가를 전전하다가 살인자 누명을 받고 법정에 서게 된다. 이 곳에서 10 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된 네흐류도프는 자신의 행위에 대한 가책을 받고 카츄사에게 사죄를 구하며 석방을 위해 노력한다. 카튜사는 시베리아 유형지까지 따라온 진심을 알았지만 그를 떠날 결심을 하고 그를 해방시켜준다. 네흐류도프는 용서를 받고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지만 잘못된 사회구조와 죄수들과 소외된 약자들의 삶을 보며 그들을 위해 헌신할 결심으로 새로운 길을 가게 된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통해 인간의 사랑과 진심, 양심과 정의가 살아 있음을 전해준다. 또 소외된 자들에 대한 이타적인 삶을 선택하는 결단 등 우리에게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었다. 제목처럼 부활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전해준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화해하고 더 나은 세상을 꿈꾸게 해준다. 얼마나 행복한 결말인가.

만일 피해자가 가해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어서 살인을 계획한다면 그런 사회는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까? 국가 간에 이런 외교 관계는 결국 전쟁을 불러올지도 모른다. 용서를 구하는 일과 용서하는 일이 우리를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게 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성공회 수장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데이먼즈 투투 대주교는 “용서 없이는 참으로 미래도 없다”라는 말을 했다. 흑인들은 인종 차별 정책에 저항하여 숱한 고난을 당했다. 이로 인해 피 흘린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끝까지 싸워 흑백 인종 모두에게 동일한 투표권이 주어졌다. 넬슨 만델라가 대통령이 되고 투투 대주교는 남아공 진실화해위원회 의장이 되어 흑백 갈등, 정치적 탄압, 고문과 실종, 계층과 빈부와 종교의 갈등을 치유하고 시정하고 관계를 회복시켜 나갔다.

일본은 아직도 사죄함이 없는 동맹을 운운한다. 과연 그들의 손을 조건 없이 붙잡을 수 있겠는가? 학폭 피해자 구조와 가해자 처벌은 미래를 열기 위해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우린 아직도 대중문화에 길들여져 가해자와 화해할 의사가 없다. 용서를 구하지 않고 용서하지도 않는다면 이런 우리에게 과연 미래가 있을까? 부활을 꿈꿀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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