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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사월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4.05 15:52
  • 호수 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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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본지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저자)

마음이 깨어 있다면 어느 때 어느 순간이라 하여 새삼스럽지 않겠는가마는, 이즈음 봄빛을 바라보노라면 자연의 섭리 사무치다네. 겨우내 얼어있고 닫혀 있던 그 완강한 대문 앞에서 이리 오너라 어느 높은 분이 서슬 푸르게 외쳤는가. 높고 거대해서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던 커다란 자물쇠가 내려지고 권세를 나타내던 창대한 대문이 스르르 열린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자 누구인가. 어느새 어느 틈 사이로 저리도 화들짝 열려서 꽃잎 열리고 있는가.

봄이 되면 외할머니 기억 속에서 비상하여 내게로 날아오시네. 봄꽃의 절정인 자목련과 함께 나에게로 천천히 걸어오시네. 치매 때문에 바지를 모자로 인식해서 바지 모자를 쓰셨네. 키보다 훌쩍 큰 가느다란 대나무를 지팡이로 삼으셨네. 그래도 딸네 집은 잊지 않으셔서 우리 집을 찾아오신다네. 가만가만 소리도 없이 걸으신다네. 뜨락에 핀 자목련을 꺽어서, 꽃이 아름다워 잡수신다. 꽃이 너무 맛있으니 치마에 가득 따서 그 맛있는 것을 손녀딸에게도 나눠주신다네. 이 세상에 없는 천진한 미소와 함께 말씀하신다네. “이것 좀 잡숴 보시오. 참 맛있단 말이요.” 손녀딸에게까지 한량없는 존칭어를 사용하는 겸손한 치매. 자목련 꽃잎이 맛있으시다니...아름다운 기억인가. 슬픈 기억인가,

그대 박각시 나방 이야기를 아시는가. 나방 그것 나비보다 더 천하다고, 배추 나비야 그래도 어여쁘지....하지만 나방은 그 가루 알러지... 불만 보면 달려든다고 어리석기 그지없다고. 그런데 어느 시인의 글에서 박각시 나방의 이야기를 읽었다네. 박각시 나방은 몸 안에 녹색을 낼 수 있는 아무런 인자가 없는데도 알을 낳을 때는 나뭇잎과 비슷한 녹색의 알을 낳는다네. 그렇다면 그 녹색 인자는 어디에서 생겨났을까 세상에, 그대여....그 박각시 나방은 애벌레 시절에 뜯어먹던 나뭇잎의 녹색을 몸 안에 감춰 두었다가 알을 날 때 녹색을 만들어 낸다네. 시인은 어머니의 마음이라고 하데만 나는 그 엽록소 이야기가 슬펐어. 푸른 잎을 먹고나서 소화시키지도 않고 그렇게 몸에 지니고 있다가 아이에게 물려준다는 것, 녹색은 알이거나 애벌레가 되어서도 생명의 색이니 말이지, 험악한 세상에서 잠시라도 숨기거나 생명을 이어갈 수 있는 보호색, 우리가 서툴고 거칠게 입고 있는 크리스챤이라는 옷도 그렇지 않을까, 그 옷을 입어서 조금이라도 덜 죄짓고 그 옷을 입어서 작은 사유라도 하며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게 아닌가 말이지,

저녁은 하루 중 가장 짧은 시간이지. 새벽이 더 짧을 거라는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새벽은 잠 못 드는 이에게 혹은 일찍 잠이 깬 이에게는 참으로 놀라울 만큼 길고 지루한 시간이라네. 저녁, 해가 이울고 어둠이 다가오기 전 바로 그 시간. 태양이 그 도시의 어느 산자락 아래로 내려가 버리면 사위는 흐릿해진다네, 그렇다고 밤의 옷자락이 아직 내리지 않았으니, 어쩌면 아직 낮의 베일이 다 사라지지 않은 탓이러니, 그래서 세상의 빛은 희부윰, 어둠과 밝음이 공존하는 참으로 조화로운 시간이라고나 할까, 가끔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낮이나 밤보다는, 아, 새벽은 제법 적수가 될 듯도 하나, 그래도 저녁답이 아닐까싶어. 사람들이 가장 허술해지는 시간, 슬며시 슬퍼지기도 하고 하루를 살짝 되돌아보는 시간, 무너지기 좋은 시간대, 그래서 정직할 수밖에 없는 시간. 그 사간에 오시지 않을가, 눈밝은이가 그러겠지. 아 당신이시군요. 오셨군요.

남쪽에서부터 꽃바람이 불기 시작했네. 조금 있으면 향기를 담은 바람이 가득가득 꽃을 피워 낼 것이네. 한결같이 다가오는 꽃은 젊음인가, 한인가, 대지의 웃음인가. 여든이 넘도록 왕성한 활동을 하는 마티스에게 누군가가 물었다네. 그 많은 영감을 당신은 어디서 얻으시는가요? 마티스가 대답했다네. 우리 집 정원에 엉컹퀴를 키우거든요. <벚나무의 가지를 부러뜨려 보아도/그 속엔 벚꽃이 없다/그러나 보라/봄이 오면/ 얼마나 많은/벚꽃이 피어나는가?/이뀨> 오래 전 시인의 우미한 통찰력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겨우 아는 것은 ‘알 수 없다’는 것뿐이라네.

생노병사는 삶의 가장 간결한 캐리커처이지. 기쁨보다 苦가 승하지 않은가, 삶의 에너지 역시 그러하지 않겠는가, 즐거움보다는 질고를 이겨내는 힘이 삶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이란 것, 그래서 결국 헛되고 헛되며 헛됨을 전도서 기자는 증언하지 않던가,

사월! 고난의 시절이자 復活時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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