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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無의 삶을 산 김용은 목사(10)김용은 목사의 생애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1.04 16:26
  • 호수 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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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은 목사

다섯째로, 부흥운동가 이성봉 목사이다. “한국교회 130년 역사 속에, 현역 때나 돌아가신 다음에도 가장 존경받는 부흥사는 이성봉 목사였다.” 라고 박종순 목사(충신교회 담임 역임)가 말한 바 있다. 김용은 목사는 ‘한국의 무디’라 불리는 이성봉 목사로부터 기도를 배웠다. 기도의 사람이 된 김용은 목사를 이성봉 목사는 많이 사랑했다.

이성봉 목사는 바쁜 중에도 매년 한두 차례 김용은 목사의 군산 집에 와서 끈끈한 정을 나누었다. 이성봉 목사 사후에 김용은 목사는 ‘성봉선교회’를 설립하였다. 김 목사는 이목사의 기도의 삶을 본받아 일평생 기도하는 목회를 하였다. 1951년 군산중동교회를 개척하고 많은 기사와 이적이 나타나고 1년 만에 60평 예배당을 짓고, 

그 후 120평과 1,100평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고 건강하고 탄탄한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인 기도의 힘이라고 믿는다. 김용은 목사는 생전에 “이명직 목사님과 이성봉 목사님은 깨끗하게 사셨고 청빈하게 사셨어요. 이명직 목사님은 신학교 학장님으로 많은 돈을 결재했지만 집도 한 채 없이 신학교 관사에서 평생 사셨고, 

이성봉 목사님은 부흥회 사례비를 받아서 어려운 목회자들에게 다 나눠주고 노년에는 원조물자로 지어진 9평짜리 후생주택에서 사셨어요. 거기서 신촌성결교회가 시작되었지요. 우리 목회자들이 배워야 합니다.”라고 하며 중동교회에 명직교육관과 성봉기도실이 있는 것도 두 분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함이라고 말했다.

◆ 두암교회 설립과 시국 강연회

김용은 전도사는 16세인 1943년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12년 동안 6Km 떨어진 입암면에 천원제일교회에 어머니를 중심으로 결혼한 동생들까지 20여명 대식구가 걸어서 출석했다. 김용은은 1945년부터 정읍제일교회를 출석하였고 정읍애육원 사역에 집중했다. 그의 가족들은 천원제일교회가 멀어 아이들이 교회에 출석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1946년부터 두암에서 가정예배를 시작했다.

주일과 수요일 공예배는 성령 충만한 정읍제일교회 김선신 집사가 맡아주었고, 매일 새벽기도회는 김용채 집사가 인도하였다. 윤임례 집사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전도하고 심방을 하였다. 평소에 효부요 인정 많기로 소문난 윤임례 집사의 사역으로 교회가 든든히 세워져 갔다. 1947년부터 신학교에 다니는 김용은 전도사가 수시로 고향에 내려와 어머니의 사역을 도왔다.

호남선 열차를 타고 천원역에 내려 고향 마을로 들어가는 길, 마른 황토길 좌우로 가난한 농부들이 땡볕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있었다. 물질적 가난, 심령의 가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민족이었다. 나라가 좌우로 갈려 분열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들의 삶은 안중에도 없었다.
김 전도사는 자신이 직접 지은 기와집에서 이웃을 대접하며 전도하고 멀리 고창 성내면까지 순회 전도를 했다.

두암교회는 1949년 1월 7일 윤임례 집사와 가족들과 동네 분들, 김용은을 전도했던 김금주 집사, 정읍제일교회에서 가장 열심 있는 기도꾼이요 전도자들로 김 전도사의 영적 동지인 고인복, 김선신 집사 등을 모시고 개척 예배를 드렸다. 고인복 집사는 한국전쟁 시 남편 박호준 집사를 두암교회에서 잃었지만 낙심하지 않고 헌신하여 전도사로, 아들 박영신도 목사로 평생 헌신하였다.

또한 김선신 집사는 정읍제일교회의 기둥으로 1952년 12월에 제일교회 장로가 되어 충성을 다했다. 두암교회가 첫 발을 떼던 그 해 대한민국은 이데올로기의 극심한 대립으로 시위와 테러가 만연해 있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을 맞이하고서도 여전히 국민의 삶은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버려져 있었다. 진리의 말씀이 이 땅에 들어와 겨우 싹을 틔웠는데 유물론을 내세운 공산주의 이념이 세상을 지배하려 하고 있었다.

김 전도사는 이북에서 사업을 하면서 공산주의의 만행과 거짓을 알고 있기에 마을 지도자들에게 찾아가서 거짓된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라고 하였다. 그들의 거짓은 얼마 후 반드시 드러나게 될 것이고 물러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마을 주민들의 마음을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농민들이나 기독교인들 중에 공산주의에 저항하기란 불가능하였다. 대부분 농민들은 저항할 의지가 없었고 혹 있어도 행동하기가 어려웠다. 김용은 전도사는 어려운 상황을 인식하고 1949년 12월 농한기에 농민들에게 북한 실정을 알리기 위해서 북한의 공산당을 경험한 임동선 전도사와 함께 소성면, 입암면, 성내면에 있는 3개면에 다니면서 사상 강연과 전도 집회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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