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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지극히 소소해도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1.04 14:58
  • 호수 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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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 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 저자 )

독서는 <문득문득> <자주자주><내 삶이 형편없이 여겨지는> 여윈 시간을 감싸주는 따뜻한 스웨터다. 무시로 꺼내 입을 수 있고 입을 때마다 그 문양과 디자인은 다르다. 몽테스키외는 말했다. “한시간동안 책을 읽고 난 뒤에서 사라지지 않는 엄청난 슬픔을 나는 경험하지 못했다고” 고양시 도서관의 무수한 책들이 나의 서재이다. 가까운 마두 도서관에 책이 없으면 상호 대차를 한다. 하루 이틀이면 가져가라는 소식이 온다. 

이런 서재를 지녔으니 나는 엄청난 부자다. 책은 낯선 삶뿐 아니라 그들의 내밀한 사유와 만나게 한다. 자신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책을 소개하기도 하며 익숙한 그림을 낯설게 하는 마법도 휘두른다. 가령 며칠 전 알랭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을 읽다가 쟈크 루비 다비드의 그림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새롭게 보게 되었다. 그리고 ‘파이돈’을 읽고 싶었다. 좋은 세상이라 장롱 안의 스웨터를 꺼내듯 아무리 밤이 깊어도 책을 빌릴 수 있다. 

경기도 사이버 도서관에서 파이돈을 구독한다. `파이돈’은 사형 선고를 받은 소크라테스의 임종의 순간을 그려낸 고전이다. ‘악법도 법’이라는 말은 소크라테스가 하지도 않은 말인데 우리는 그의 명언이라고 학교에서 배웠다. 친구들이 도망갈 기회를 마련해 주는데도 도망을 가지 않았다는 해석이 그렇게 와전된 것이다. 언감생심이지만 깊은 밤 혼자 하는 놀이이니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나의 죽음도 살짝 얹어보는 책읽기라고나 할까, 

소크라테스는 영혼을 믿은 사람으로 자기 죽음 앞에서 당당할 수 있었다. 그는 죽음 뒤의 세상이 있다고 확신했고 죽음 뒤의 세상이 현실의 삶보다 나으리라는 것을, 더 좋은 사람들과 스승을 만나리라고 확신했다. 다비드의 그림은 꽤 긴 대화체로 되어있는 파이돈을 한 장의 그림으로 압축해 놓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온 소크라테스 아내는 감옥 문을 나서고 있고 친구와 벗, 제자들이 통곡하며 슬퍼하는 모습들이 파이돈의 어떤 문장 못지않게 선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바닥에 쇠사슬이 있다. 마지막 죽음의 날이라고 묶인 쇠사슬을 풀어주었을 때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쾌락이란 정말 묘한 것일세. 고통과 쾌락의 관계 역시 묘한 것일세. 지금 경험해 보니 사슬에 묶여서 발이 아프다가 고통이 사라지니 쾌감이 뒤따르는 것 같네.” 파이돈의 내용과 조금 다른 것은 플라톤이다. 파이돈을 쓴 플라톤은 플라톤이 병중이라 그 자리에 없었다고 기록하며 실제로 파이돈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그런 플라톤을 다비드는 맨 앞자리에 그렸다. 독약을 드는 소크라테스를 바라보지 못하겠다는 듯 아예 등을 돌리고 앉아있는 플라톤. 기록하는 자답게 그 곁에는 두루마리와 필기구가 떨어져 있다. 소크라테스가 죽음을 맞이할 때 플라톤의 나이는 약관 29세였다. 다비드는 그런 플라톤을 머리 하얀 늙은이로 묘사했다. 그의 고통을 머리 세기로 표시한 것일까, “이제 나는 죽기 위해, 그대들은 살기 위해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우리 중에 어느 편이 더 나은 쪽으로 가게 될지는 저 신만이 알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은 곧 육체로부터 영혼이 해방되는 것이라고 보았고, 진정한 철학자는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좁은 감옥이지만 그곳엔 생과 사가 있고 빛과 어둠이 선명하게 인물들의 모습과 심리조차 잘 나타내주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처한 상황이지만 그림 속에서 가장 밝게 빛난다.그는 말한다. 삶이 있어서 죽음이 있는 거라면 또한 죽음은 삶의 원인이 아니겠냐고. ‘죽음의 문이 너에게 나타난 적이 있으며 네가 사망의 그늘진 문을 본 적이 있느냐?’ 욥기의 기록이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사람마다 얼굴 다르듯이 행복의 모습도 천차만별이다. 무엇보다 행복은 바로 내 곁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파랑새에서 배우고 삶의 매시간 그것들을 익혀왔다. 그래선지 어느 때부턴가 내게 다가오는 삶 속의 작은 기쁨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삶아서 끓인 배추 된장국을 먹을 때, 알맞게 익은 김장김치의 맛에 놀랄 때, 연주회를 보고 어둑한 밤길을 걸어가는데 하늘에서 희끗희끗한 눈이 성기게 날 릴 때 ...... 지극히 소소한 것으로 객관성이 떨어지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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