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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가을, 지금 여기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2.10.19 15:14
  • 호수 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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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 저자)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황제의 2악장 아다지오는 영화 속에서 자주 회자 된다. 카핑 베토벤에서도 이 아름답고 장중한 곡은 영화에 비극성을 더하며 베토벤을 더욱 사랑하게 만들고야 만다. ‘자전거 탄 소년’에서 주인공 시릴의 테마라고 불리는 아다지오. 

영화 속에서 얼마나 감질나게 나오던지, 음악이 나오는 순간 몸을 의자에 파묻히려 허리를 살짝 움직일 때 사라져버린다(음악이 좋으면 의자로 몸 구겨 넣는 버릇이 있다).

축배의 노래를 뺀 대부는 어떨까, ‘앨비라 마디건’에서 모짤트의 피협을 삭제한다면, ‘신과 함께 가라’에서 찬송가 341장을 빼버려도 영화가 될까? ‘아웃오브 아프리카’에서 케냐의 자연 못지않은 힘을 발휘한 것은 모잘트의 클라리넷 소리였다. 

가령 모든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음악이 없다는 상상을 해보자. 아마도 엄청난 감정의 절제가 이루어질 것이며 영화는 건조해서 푸석거릴것이고 감독은 영화의 의미 전달을 위해 머리를 싸매야 할 것이다.

그래서 리얼리스트 감독 다르덴 형제들은 자신들의 영화 속에서 ‘감정 조장’을 위한 음악사용을 극도로 경계하는데 ‘자전거 탄 소년’에서 황제 이 악장 아다지오를 넣었다. 장중하면서 슬프고 고통스러운 음악이 상처 입은 소년의 등 뒤에 내리 꽂히는 순간, 영화를 보는 견자들은 순간적으로 소년의 감정 세계, 아니 소년화 되어버린다.

음악이 지닌 비 논리성의 발현이 시작된다고나 할까, 그러니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음악이 지향하는 좋은(?) 세계로의 비상이며 가장 익숙한 나로부터의 탈출일 수도 있으리라. 

논거로서 썩 선명하지는 않으나, 가령 쓸쓸할 때 쓸쓸한 음악이 마음속에서 역사하는 것은, 중화력일까, 아예 쓰나미처럼 초토화하는 것일까, 아니면 각자 서 있는 위치에서 즉 음악과 내 마음이 만날 때 때 마음 스스로 힘이 생겨 추스러지는 것일까,

하루 이틀 새 가을의 걸음걸이가 성큼 거리는 듯 가로수 잎들이 물들어간다. 벚나무야 워낙 일찍 물드니 그렇다 쳐도 단풍스러운 이름을 지닌 당단풍도 제법 붉어져 있다. 사교성 좋은 느티나무도 여기저기 물들어간다. 우리 동네에는 이상하게도 북한산 자락에나 서 있던 쪽동백을 드문드문 만날 수 있는데 가을빛을 입어 노랗게 엷어져 가며 동네를 山化 시켜준다.

아주 이른 봄 산은 동글동글하다. 가지만 있던 나무에 작은 이파리들이 솟아나면서 가지가 지닌 직선을 뭉개며 마치 봄을 좋아하는 화가가 부드러운 터치라도 하는 것처럼 산이 몽실거려지는 것이다. 이파리 자체가 동그란 것은 아니로되 어린 순이 지닌 어쩔 수 없는 말랑거림이라고 할까, 가을 산도 봄 산처럼은 아니지만 몽실거리고 둥그스름해진다.

질기고 강하던 녹색의 이파리들이 습기 마르고 바스락거려지며 몸이 작아지고 작아진 몸을 둥그렇게 말아가기 때문이다. 봄 산과 가을 산은 얼핏 비슷해 보이면서도 확연히 다르다. 어린아이의 무지와 연약함이 사랑스러움 자체라면 노인의 무지와 연약함은 이해나 배려를 필요로 하는 조촐한 상황이라고나 할까,

고운 단풍을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사실 무리 지어 있을 때 이야기다. 다가서서 자세히 바라보면 단풍든 잎새 치고 상처 입지 않은 것은 없다. 마치 그 고운 색이 인고의 결실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긴 지난 한 해 살아오면서 오죽 많은 일을 겪었으랴, 벌레가 있다는 것은 나뭇잎에도 편안한 상황이지만 벌레를 견디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늦봄에 다가온 차가운 봄 눈은 왜 그리도 매섭던가, 바람은 호흡하기 좋게만 불어왔던가, 마치 원수라도 만난 듯 흔들어 댈 때가 많았다. 비도 알맞게만 와 주면 좋으랴만 수시로 뭇매를 때리지 않았던가, 햇살이 없으면 살 수 없지만, 한여름의 햇살에 질린 적도 많았다.

그러니 단풍은 상처였다. 상처는 참으로 자연스러운 존재였다. 상처 없는 자연은 없었다. 설마 그러랴만 상처로 인해 단풍 저리 곱게 든 것일까, 단풍은 영화 속 음악 같은 존재다.

호모 파베르는 도구를 만드는 사람이고 호모 루덴스는 유희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며 호모사피엔스는 사유하는 사람을 지칭한다. 유토피아 인들은 여섯 시간의 노동 뒤에 한가로움과 사색에 몰두했다고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의 행복은 가장 아름다운 것 곁에서 사색에 잠겨있을 때라고 했다.

가을은 호모사피엔스를 지나 호모 루덴스로 건너가게 하는 시절이다. 한가로움 속에서 사색에 젖는 이 가을, 혹시 내 사는 곳이 유토피아가 아닌가, 그래서 지금 최고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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