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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선 박사 창문 칼럼(88)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의 전도
  • 박지현 편집국장
  • 승인 2022.04.20 17:47
  • 호수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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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초기 선교사들이 입국하던 19세기 중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식민주의의 전성기로서 강대국들이 약소국가들에게 찬탈을 자행하였던 위기의 시대였다. 바로 이 시기에 미국과 영국 그리고 호주와 캐나다 각국 선교단체의 선교열도 최고조로 이르게 되었다. 위와 같은 기독교의 선교를 부정의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에서는 선교를 식민지 확장 정책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강대국들의 식민지 확장 정책이 복음을 전하는데 부정적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선교는 그만큼 넓어진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때때로 기독교의 복음은 세상 정부의 권세나 문화를 역행해 전파되거나 그것을 배경으로 지지받으며 전파되었다. 특히 아시아로 전파된 기독교는 여러 종교와 문화를 정복하는 데 있어 정체성이 왜곡되거나 소멸되었으나 서방으로 전파된 기독교는 로마제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문화를 거슬러 성장하고 로마제국을 기독교화 시켰다는 것이다. 선교는 유럽만을 기독교화하는데 머물다가 해상의 발전과 지리상의 발견으로 인하여 세계는 더욱 확장되어 넓어지게 되었다.

“문화의 이식(移植)은 선교의 주목적은 아니나 선교의 필연적 결과요, 덤으로 따라오는 부산물”이라고 한 바르넥의 말과 같이 선교사들은 복음의 전도자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 산업 혁명을 통한 자연과학과 산업이 앞선 구미의 문화를 소개하고 전달하는 문화 전수자의 역할 또한 획기적으로 파고들었던 것을 역사적으로 발견하였다. 선교사의 기질이나 교양, 혹은 선교지 민족의 특성과 토착문화에 대한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는데 초기 선교사들은 거의 우회적인 전도 방법을 사용하였다. 예를 든다면, 의사 선교사들은 병원과 학교를 세워 의료 활동과 교육 사업을 진행하였고 의사소통을 위한 노력과 성경번역은 선교사업의 초석을 놓는 것으로 언더우드 선교사, 피어선 선교사, 월리암슨 선교사, 레이놀즈 선교사들 역시 이러한 것들은 충실히 이행하였다.

조선과 미국 사이에 수교 조약이 체결된 후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입국한 사람은 의사 알렌 선교사다. 조선 정부에서는 선교활동을 하지 않은 터라 알렌 의사는 처음에 주로 서방 나라의 영사관 직원들을 상대로 의사로서 활동하다가 고종의 인정을 받아 시의(侍醫)가 되었다. 1884년 12월 개화당의 봉기 사건이 있었을 때 자상을 입어 위독한 민영익을 선교사 알렌이 구하게 되었고 이 일로 신임을 얻어 1885년 2월 25일 조선 최초의 병원인 광혜원(제중원)을 설립하였고 후에 1904년에 세브란스병원으로 발전되었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 북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와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가 입국하였고, 감리교 스크랜턴 부처와 모친 매리 스크랜턴, 헤론이 입국하였다. 호주 장로교회에서 1889년 10월에 데이비스와 누이가 입국하였고, 영국 성공회에서는 1890년 코프 감독과 6명의 목사, 2명의 의사가 와서 선교사업에 착수하였다.

미국 남장로교는 1892년 호남지방에 선교를 시작으로 테이트 목사, 그의 누이 마티, 데이비스,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친 이눌서 목사, 전킨 목사가 선교를 진행시켰다. 미국 남 감리교 선교부는 1896년 리드 목사를 보내었고, 캐나다 장로교회 출신인 맥켄지 목사는 독립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소래에 거주하면서 서경조(서상륜의 동생이며 후에 장로교 초대 목사가 됨)의 도움을 받아 소래교회를 신축하였다. 후에 캐나다 장로교회는 맥켄지의 죽음을 계기로 1898년에 그리어슨 부처, 푸트 목사 부처, 맥 캐어가 함경도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

펜윅을 통하여 시작된 침례교의 선교는 1895년 폴링, 게이들린 등이 충남 공주와 강경에서 활동하였으나 재정적 어려움으로 중단되자 펜위크가 인계하여 1906년에 ‘대한기독교회’라는 독자적인 조직을 갖추고 선교에 착수하였다. 성결교회는 도쿄에서 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 정빈이 1907년에 귀국하여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 ‘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고 개칭하고 웨슬리 사상을 따르며 4중복음의 교리를 가졌다. 또한 구세군의 선교는 1908년 호가드의 내한으로 시작되었으며, 자유교회로 알려진 플리머스 형제단은 1896년부터 시작되었고 노리마츠와 조덕성, 신태일 등과 함께 서울과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전도 활동을 펼쳤다.

미국에서 온 개신교 선교사들은 개방의 물줄기가 최고조의 적절한 시기에 한국으로 왔다. 가톨릭 신자들처럼 핍박받고 적대시 당하는 일이 비교적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은 일본과 중국에 의해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기에 중립을 지키는 듯이 보이는 미국이 우방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한반도에 세력을 구축할 의욕이 전혀 없었다. 후에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강제로 한국과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수교권을 박탈하였고, 1907년 7월 비밀리에 테프트-가쓰라 조약을 맺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는데 미국과 협약을 하게 된다. 우리나라에 온 선교사들은 이 문제를 인식하고 있었고 이화학당 교장 길모어 부인은 서양식이 아닌 한국 여성이 되길 바란다며 피력했고 언더우드 선교사 부인도 같은 얘기를 줄기차게 하였다.

한국교회사에서 역사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선교사들이 다양한 면에서 조선의 개화와 사회적인 계몽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정부 인사들은 선교사들을 일정부분 다른 인사들보다 좀 더 신뢰하고 인정했으나 자신의 권력에 대한 보다 큰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전국적으로 자유로운 선교는 유보돼 있었고 전적으로 허락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우회적으로 조심스럽게 트라이앵글 선교 정책으로 선회하여 먼저는 학교를 설립하였고 다음으로 병원을 개원하여 국민과 친숙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복음을 받은 후손으로서 지혜로운 선교 방법을 채택한 선교사들의 희생과 헌신의 노고에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세계에서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의 사역에서 100년 후의 열매를 바라보며 씨앗을 뿌리는 수고에 성령 하나님의 위로와 인도하심을 간구하면서 선교한국 강국으로서 더욱 발전되기를 소망한다.

최 선 박사(Ph.D., Th.D., D.Min.)

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

서울·포항 FEBC극동방송 칼럼니스트

기독교헤럴드 논설위원

OCU사회복지학과 겸임교수, 한국포스퀘어신학교 교수

전 안양대학교 외래교수

전 건신대학원대학교 강사

전 경희대학교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전 총신대학교 평생교육원 외래교수

▲저서: 희망 아름다운 세상, 존낙스의 정치사상,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그대 고마워라, 소중한 만남, 기독교 집단상담, 김치선 박사와 이성봉 목사의 삶과 신앙

(2018 킹덤북스)외 전자책 30권 이상

한국문학방송작가회 전자책 출간 작가 315명 중 7위 작가

 

박지현 편집국장  dsglory36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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