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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패커가 남긴 신학적 유산(8)청교도적 삶의 실천
  • 김영한 박사(기독교철학, 숭실대 명예교수)
  • 승인 2020.11.26 16:09
  • 호수 499
  • 댓글 0
김영한 교수(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이때 패커는 20년간 함께 청교도 콘퍼런스를 개최한 로이드 존스와 함께 하지 않고 존 스토트의 입장에 섰다. 그리하여 패커는 동료요 선배인 로이드 존스로부터 결별을 당했다. 이는 교회의 연합이 중요하다는 패커의 공교회에 대한 신념에 입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2008년 패커가 속해 있는 교회인 캐나다 성공회에서 가장 큰 회중인 세인트 존스 교회(St. John’s Church)가 캐나다 성공회에서 분리해 보다 복음주의적인 아르헨티나 교구와 하나가 되려고 하였다. 패커에게 다음 두 가지 죄목이 뒤집어 씌웠다: ①캐나다 성공회의 교리와 치리를 공적으로 거부한다 ②캐나다 성공회 밖의 다른 종교적 단체와 하나됨을 추구했다. 패커로는 영국 성공회가 임직 때에 부여 했던 말씀과 성찬을 섬기는 목사의 권한을 박탈한다(revoked)는 결정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패커는 영국 성공회로부터 공식적으로 거부되었다. 그러자 세인트 존스 교회는 캐나다 성공회 네트워크(the Anglican Network in Canada=ANiC)에 속하였고, 이곳은 다시 2009년 북미 성공회(the Anglican Church in North America)에 속하였다. 패커 자신은 영국에 있을 때나 캐나다에서나 계속해서 성공회 안에 있으면서 이를 좀 더 복음주의적 방향으로 변화시키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성공회 자체가 일종의 분열을 한 셈이 되었다.

VII. 청교도적 삶 실천

1. 청교도적 신앙 실천

패커가 태어난 가정과 교회의 종교적 분위기는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복음주의적 신앙이

아니라 명목상 성공회에 가까웠으며, 패커는 그의 가정과 교회에서 복음주의적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

​패커가 겪은 어린 시절의 경험은 7살 때인 1933년 9월 괴롭힘을 당하던 아이들로부터 학교운동장부터 글로스터의 번화한 런던 도로까지 도망치다 차에 부닥쳐 머리에 심각한 상처를 입은 사건이었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머리 쪽에 눈에 띄는 움푹 들어간 흉터를 갖고 살았다. 그런데도, 패커는 어린 시절부터 자기 삶의 섭리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패커는 옥스포드 대학교 학부생으로 입학한 지 2주 만에 그리스도인으로 회심하였다. 패커는 1944년 10월 22일 캠퍼스 기독인 연합회(IVF, Inter-Varsity Christian Fellowship) 지부가 후원하는 복음주의 모임에 참가하면서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패커는 학업에 열중하는 지성적 학생이었지만, 옥스포드에서의 그의 삶의 핵심은 영성이었다. 패커는 옥스퍼드에서 C. S. 루이스의 강의를 처음 듣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C. S. 루이스와는 개인적으로 친분이 없었지만 C. S. 루이스는 패커의 삶과 사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패커는 그의 삶 속에서 구약의 ‘전도서’를 통해 지혜를 얻기도 했다. 젊은 시절 한때 냉소주의에 빠졌던 그는 전도서를 읽고 치유됐다고 고백했다. 그는 “전도서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계획하고 주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어리석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책”이라며 “사람은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모든 지혜를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패커는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는 대학 때 발견한 청교도들(the Puritans)에 푹 빠져 청교도를 연구하고, 전하고, 자신이 청교도로 살기를 원했다. 그는 자신이 누구보다 존 오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공언하면서, ‘후대의 청교도(a latter-day Puritan)’라고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패커는 1950년대에 「복음주의 계간지」(the Evangelical Quarterly.)에 케직신학(Keswick theology)을 “펠라기안적”(Pelagian)이라고 맹렬히 비난한 글을 발표했다. 이는 단지 학문적 비판이 아니라 패커가 나중 그의 저서 『성령을 아는 지식』에서 상기(想起)하는 바 같이 자신이 케직 운동이 주장하는 신자의 승리하는 삶과 내적 수동성의 교리가 자신의 내면적 경건성 추구와 차이가 있었고 여기서 오는 신학적 갈등 속에서 나온 표명이었다. 패커는 자신을 제3자로 지칭하면서 자신의 내면적 체험을 상기하고 있다: “그(필자 주: 패커 자신)는 자신을 완전히 바치려고 노력했지만, 번번히 자신이 있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자신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것은, 자신을 온전하게 헌신하고 비운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누려야 할 승리의 삶, 능력으로 채워진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였다....하지만 일이 순조롭게 풀려서 상당한 책 벌레였던 그는 뜻밖에도 생명줄 같은 글을 만나게 되었다.. 그 글은 당시에 그가 어떻게 자신을 다뤄야 할지 보여주었고, 그가 추구해 오던 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바로 그 학생은 나였으며, 내가 읽었던 책은 청교도 존 오웬의 전집 6,7권과 라일의 『성결』(Holiness)이었다.”

김영한 박사(기독교철학, 숭실대 명예교수)  dsglory36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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