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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니우스 심층분석 (27)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0.04.01 16:26
  • 호수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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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웅 교수(한국코메니우스연구소 소장)


코메니우스가 이끌었던 보헤미아의 형제연합교회는 30년 종교전쟁이 끝난 후,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해, 역사 속에서 흩어지는 교회(디아스포라)가 되고 말았지만, 이들은 ‘복음의 숨겨진 씨앗’으로, 신앙의 명맥을 아직도 교회의 역사에서 잇고 있었다. 우연하게도 이들은 크리스천 다비드(Christian David)라는 인물에 의하여 1722년 친첸도르프에게 소개되었고, 이들을 친첸도르프의 땅인 ‘헤른후트’(Herrnhut)로 이주하여 살도록 다비드의 요청을 친첸도르프가 기꺼이 받아들여, 그다음 해에 모라비아의 형제들이 대거 헤른후트로 이주해 오게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이전에 코메니우스가 모라비아 지역의 풀넥(Fulneck)에서 목회할 때, 함께 했던 그 형제연합교회의 후손들이었다. 그 때문에 옛 형제연합교회의 전통은 그들 가운데 여전히 살아 있었고, 헤른후트(Hernnhut)는 새로운 형제교회로의 발전에 크게 기여 하는 거룩한 땅이 되었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그들은 특히 모라비아 동편 지역의 라이토미슐(Leitomischl)이란 곳에서 계속 이주해 오게 되었으며, 헤른후트의 신앙공동체는 점점 더 큰 연합의 공동체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숨겨진 복음의 씨앗들’은 역으로 헤른후트의 경건운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것은 이들 형제연합교회의 이전의 신앙방식 때문이었는데, 이들은 주일예배 외에도 주간에 빈번한 작은 성경공부 모임이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가정기도회를 강조할 뿐만 아니라, 신앙 교리에 대한 사색은 멀리하고, 일상의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하는 신앙실천운동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서 세상에 대한 금욕적인 형태의 폐쇄적인 모습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리고 헤른 후트에서 오늘날도 매일 ‘성경읽기 책자’(Losungen)가 발간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형제연합교회(모라비아인)가 오래전부터 실천하고 있었던 매일 성경 읽기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살아 있는 신앙적인 책임의식이 자라게 되었는데, 그것은 모든 믿는 자들의 복음 선교에 대한 의무감이 실천적으로 발전하게 된 모습에서였다.
 
  역시 친첸도르프는 선교적이며 교회연합적인 목표를 가지고, 형제교회(모라비아인)가 그 지역 루터파교회(Landeskirche)의 지체로 동화되기를 여러 차례 권유하였지만, 다른 이주자들과 합세하여 그들 이전의 모라비아 형제연합교회와 같은 모습을 그곳에서도 유지하기를 원했고, 그들 자체의 교회법과 감독을 가진 자립적인 교회조직체로 남아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거기서 옛 형제연합교회의 모범에 따라 교회와 지체들의 삶을 보호하는 평신도 장로의 직무가 세워지며, 교회훈육도 도입되었고, 형제연합교회가 수년 동안 지켜온 간단한 형식의 예배가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헤른 후트 신앙공동체에 새로운 경건의 형태로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1735년에는 차우크텔러(Zauch- teler)에서 이주해 온, 뉘츠만(David Nitschmann)은 헤른후트의 형제연합교회 감독이 되었으며, 그 후에 친첸도르프도 2년간 형제교회(모라비아인)의 감독직을 이어받기도 하였다. 이제 새로워진 형제교회는 이웃사랑과 어린이교육을 어려운 조건에서도 잘 감당하였으며, 용감한 신앙증언자로서의 봉사활동을 지속하게 되었다. 
 
  그 이래로 헤른후트의 형제교회는 수십 년간 전 세계를 향한 해외 선교에 열중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코메니우스가 그 시대에 이미 그의 글들에서, 해외 선교의 중요성과 그 길에 대한 것들을 잘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복음 선교의 정신은 친첸도르프에게도 영향을 미쳐, 가난한 이방인들을 돕는 복음적인 선교가 헤른후트(Herrnhut)에서 시작되었고, 이곳 헤른후트(Herrnhut)는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최초의 해외선교사를 파송하는 역사를 시작한 곳이 되었다. 벌써 1733년에 크리스천 다비드는 그뢴란드(Groenland)선교사로 파송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감독이 되었던 다비드 니취만도 덴마크의 서인도에 있는 성 토마스 섬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갔었다. 그 후에 친첸도르프의 신앙공동체인 형제교회는 선교지역을 점점 더 확대하여, 아프리카 지역의 자마이카, 수리남 등, 여러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었다. 1734년에는 북아메리카 지역인 조지아주와 펜실바니아 등에 선교과제 실현과 결부된 식민정책에 관여하기도 하였다. 특히 다비드 니취만(D.Nitschmann)은 풀넥의 차크텔에서 이주해 온 형제로서 선교 열정을 그 자녀들이 이어받아, 북미지역의 인디안 선교에 크게 헌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 역사에서 칼 파칼트(Karl Pa’calt)는 체코인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오늘날까지도 그가 선교사로 활동했던 지역에다 ‘파칼도르프’ (Pacaldorp)란 마을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1735년 다비드 니취만이 그의 형제와 가족으로 구성된 선교단체를 이끌고 북미지역으로 항해할 때, 감리교회의 창설자인 요한 웨슬레이(John Wesley)가 그 배에 함께 타고 있었으며 그들 모라비아 형제들의 신앙의 영향을 받게 된다. 웨슬레이는 모라비안 형제들이 항해 동안에 바다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도 믿음의 용기와 겸손함을 견지하는 그들 신앙 태도에 큰 감동을 받게 되었고, 그 일로 웨슬레이는 이들 모리비안 형제들과 계속 교제하였으며, 영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형제교회와 연결하여 그들에게서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역시 웨슬레이는 독일의 헤른후트에 있는 형제교회를 방문하였고, 친첸도르프와도 교제하게 되었다. 1738년 요한 웨슬레이의 회심은 이러한 영향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웨슬레이가 영국에서 일으켰던 신앙부흥 운동은 처음부터 모리비아 인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크게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웨슬레이는 이러한 모리비아 형제들에게 받은 영향을 잊지 않았고, 감리교도들은 여러 가지 점에서 헤른후터(Herrnhutter)의 경건 방식에 큰 영향을 받고 있는 모습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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