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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 <13>신사참배 거부 독립지사, 부산초량교회 조수 전도사 (1914~2002)
  • 서광호 기자
  • 승인 2018.12.29 15:48
  • 호수 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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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초량교회는 1892년에 11월 선교사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에 의해 부산에서 최초로 설립된 교회이다. 주기철 목사, 이약신목사, 한상동 목사가 시무하면서 일제에 대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고, 일제강점기 내내 신사참배 투쟁의 거점이 되었다. 6.25전쟁 기간에는 피난동포를 돕는데 앞장섰으며, 피난 온 목사 250명이 초량교회에 모여 2주간 통회자복 기도회가 있은 후 유엔군 상륙이 이뤄졌으며, 지금도 부산지역 복음화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

조수옥 여전도사는 경남 하동읍에서 출생하여 19세가 되던 해에 결혼 하였으나 21세 때 남편의 외도로 파혼하게 되었으며 그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1937년 6월 23세의 젊은 나이로 삼천포 교회에서 전도부인으로 시무하게 되었다. 삼천포 시에서는 전교인을 신사참배 시키기 위하여 강제 소집하였으나 조전도사는 끝까지 반대하여 경찰서장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았다. 1938년 11월 초량교회는 갈 곳 없는 조 전도사를 전도사로 받아 드려 시무케 하였다. 신사참배 강요는 1935년 평양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를 분열,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시행된 일제의 정책이었다.

 1937년으로 접어들자 일본국기 게양, 동방요배가 신사 참배와 함께 요구되었다. 이와 같은 일제의 정책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처음에는 저항하였으나 탄압과 회유에 못이겨 다수의 지도자들이 마지못해 친일적 배교의 길을 갔다. 그러나 주기철, 이기선, 이인재, 한상동, 주남선, 조수옥 등은 신사참배에 끝까지 반대하고 저항하였다.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천주교(1936. 5. 25)가, 굴복하였고. 당시 대표적인 교단이었던 장로교도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종교적인 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라고 하며 이를 가결하는 큰 수치를 범하게 되었다.

그 당시 초량교회에서는 조수옥 전도사가 앞장서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39년 8월에는 수영로 해수욕장에서 모임을 갖고 신사참배 반대운동 모의를 하였다. 

이때 참석한 인사로는 한상동 목사, 사모김차숙, 한정교목사, 사모이정, 윤술룡 목사, 이인재 전도사, 백영옥 집사, 김현숙 전도사, 배학수, 조수옥 전도사였다. 1940년 9월 20일 새벽 4시 자택에서 검거되어 북부산 경찰서로 압송되었고, 그 후 1941년 8월25일 평양형무소로 이송되었으며 그때 같이 구속된 인사로는 주기철 목사, 방계성 장로. 한상동목사, 손명복전도사등이있었다. 신사참배반대 운동을 하다가 투옥된 신자는 약 2,000여명으로 추산되는데 그중 50명 정도는 옥사했고 해방 후 30여명이 출옥하였다. 이때 출옥한 인사 중에는 방계성, 서정환, 안이숙, 이기선, 이인재, 조수옥, 주남선, 최덕지, 채정민, 한상동 등이었다. 조수옥 전도사는 1945년 8월 17일 해방과 동시 출옥하였다. 1945년 12월 이약신 목사의 권면으로 마산에 인애원(仁愛院)을 설립하여 많은 불우 청소년을 양육하였으며 현재의 경남종합사회복지관이 그 사업을 이어가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대한예수교장로회전국여전도회회장을 역임하는 등 각종 단체에서 활동하였으며 1986년 5월 대한민국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하였다. 그는 2002년 10월 28일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서광호 기자  seojac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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