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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한국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 <11>독립운동과 성결교단에 밑걸음이 된 이상철 목사 (1897 ~ 1935)
  • 서광호 기자
  • 승인 2018.12.29 15:19
  • 호수 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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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철은 1897년 경상북도 달성군 유가면에서 현풍교회 창립자 이영우 장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이후 자천교회와 구직교회를 창립했고, 그의 백부 이상윤 장로는 창령 대진교회를 개척했기에 이상철은 어릴 때부터 복음적 가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는 8세에 논어를 통독하리만큼 총명했으며 미션학교인 대구계성중학교에 진학했다. 이상철은 일제에게 국권을 찬탈 당하자 계성학교 출신 애국청년들과 대구지역 독립운동의 주축을 이뤘다. 동기생으로는 이두산(전 광복군 부사령관 급 및 군수처장), 이영준(전 세브란스 병원장, 국회부의장) 등이다.

그는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진력하고자 1918년에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실습기간에는 현풍 하동교회와 고령 객기교회에 내려와 유가, 고령, 구지 일원에서 조사(助事)로 봉사했으나 실제는 대구지역의 독립운동 책임자로 암약했다. 이상철은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세브란스의전 이영준과 긴밀히 연락하여 독립선언문을 입수했고,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했다. 대구지역 독립운동은 이상철의 주동으로 현풍, 고령의 장날을 택하여 일어났고, 유가 구지에서는 마을 주민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때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이 거세어 일본 경찰은 주재소 조직으로는 제압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이상철은 동지들과 1, 대구·달성 지역 내에 있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수족이 된 자에게 경고문을 발송·전달하여 관리직을 사임케 하고, 2, 임시정부발행 공채를 대한인들에게 인수하도록 공작을 하고. 3, 일본물품 불매운동을 전개하며, 4, 세금 납부를 거절하는 운동을 5, 3·1운동을 확인하고자 오는 미국 국회의원단에게 대한인들의 애국심을 인식하게 하는 조직적

투쟁을 하였다. 그리고 대구에 있는 부헤리 선교사, 경성의 카우만 선교사, 허인수 선교사 등에게 전달하여 대한인의 독립의지를 국제회의에 호소하였다.

이상철 목사의 독립운동사는 그의 소천 반세기가 지나도록 알려지지 않다가 1983년 애국지사

김은수가 아들 김주보에게‘이상철 목사의 유족을 찾아 그 은혜에 보답하라’는 유언에 따라서 이목사의 아들 이병희를 찾아와서 ‘독립운동사료집 제5집’3·1운동 재판기록에 명시된 증거서류를 제시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의 아들 이병희는 다락방에 감추어놓은 공채를 목격했다고 한다. 그 이후 외손자 김소영 목사(기독교서회 전 사장)가 앞장서 ‘애국선열 이상철 목사 기념비 건립위원회’가 발기되었고 1990년 12월 26일에 정부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상철은 1921년 새로운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서 동양선교회 카우만 선교사를 통해 경성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교)에 편입학하여 1922년에 제11회로 졸업하게 되었고 같은 해 4월 9일에는 장남 병희가 출생하였다. 이후 성결교단을 위하여 목회자로 여생을 헌신하였다. 이상철 목사는 복음의 사자로 변신하여 철야기도, 금식기도를 일삼으며 경성성서학원 교수로, 사감으로, ‘활천’잡지 책임자로, 교단이사회 이사로, 한국성결교회 초창기 교단 행정가로 혼신을 다하다가 38세에 순직했다. 그가 다시는 눈물과 고통이 없는 나라로 떠났으니 그날은 1935년 12월 25일 성탄절이었다. “이상철 같은 인물만 우리교단 사역자가 된다면 우리 단체는 반드시 성장하고 승리할 것”이라고 길보른 총리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서광호 기자  seojaco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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