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덜어 주는 친구

그 뒤 광명에 있는 의상실에 다시 취업했을 때는 초보 자리부터 착실히 배웠습니다. 1년 반 정도 견습생으로 지내다 친구 박태우와 육촌 누님의 도움으로 1978년 명동에 의상실을 차렸습니다. 시작하면서 큰소리는 쳤지만 여러 문제에 부딪혔습니다. 무엇보다 여성 상의는 꼭 입체 재단을 해야 하는데, 어디서도 배울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아쉽게도 기술을 나누는 것에 인색합니다. 나는 본격적으로 디자인을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가리라 마음 먹었습니다.

일본으로 가는 길은 쉽게 열리지 않았습니다. 나고야스미레 양재학원에서는 입학 허가를 받았는데 영사관에서 뒤늦게 거절 통보가 왔습니다. 보증인이 적합하지 않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내 보증인은 일본에서 생선 도매업을 하는 분이었는데, 원천 징수세 납입 영수증을 제출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분 나름의 피치 못할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미 의상실까지 팔고 한국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뜻밖의 소식에 기가 찼습니다. 꿈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나는 그때 9년 연애 끝에 결혼한 뒤였고, 아내는 첫 아이를 임신 중이었습니다. 얼른 마음을 추스르고 생활 전선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단 돈암동에서 남대문 시장에 납품하는 공장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잘 풀리지 않았고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갖고 있던 돈마저 모두 날리고 말았습니다. 그해 10월에 큰딸 지선이가 태어났습니다. 그때처럼 막막하던 때가 또 있었을까. 당장 분유 살 돈이 없었습니다. 아내에게는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쳤지만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런 내 사정을 알았는지 친구 최세교가 찾아왔습니다. 고등학교 때 놀기 좋아하던 나와는 달리 공부도 잘하고 신앙도 좋았던 친구였습니다. 손에 분유가 가득 들려 있었습니다. 당시 세교는 동력자원부에 근무했는데, 정부종합청사 건물에 있는 가게는 공무원에게 할인 혜택을 준다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그때부터 여러 달 동안 친구는 열심히 분유를 사다 날랐습니다.

지금도 큰딸에게 농담처럼 건네는 말이 있습니다.

“지선아, 너 팔다리는 세교 아저씨가 만들어 준 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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