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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 <178>아득한 길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4.04.25 12:02
  • 호수 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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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풀이 무성한 푸서릿길을 걷거나 나지막한 산에 경사진 자드락길을 걷을 때면, 무엇보다 아무도 없는 나뭇잎 그득히 덮인 산길을 걸을 때면 길은 단순한 길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취로 다가온다.

그 옛날 어느 사람이 아무도 걷지 않았던 곳에 조심스럽게 첫발을 내디뎠을 것이다. 그다음 사람, 또 그 다음 사람..... 그렇게 사람의 발로 만들어진 다져진 길은 차츰 사람들에게 익숙해졌을 것이다. 사람이 길을 만들었지만, 어느 때부턴지 길이 사람을 부르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걸으며 바라보는 길은 보이지 않는, 혹은 보이는 역사의 길이기도 하다.

하냥 변함없을 것 같은 길, 하지만, 순식간에 돌변하기도 한다. 어두워진 하늘 아래 빗방울 내리면 시작되는 빗길, 젊음의 때 어느 시절에는 비만 오면 하염없이 빗길을 거닐었던 시간도 있다. 반바지에 슬리퍼와 우산이면 충분했던, 우산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려주어서 더없이 호젓할 수 있었던 길. 함박눈 펑펑 내리는 눈길은 그 말할 수 없는 공평으로 인해 고통조차 견디게 하는 에너지를 주고야 만다.

사람의 길만 있는 것도 아니다. 비행기 길도 있고 기찻길도 있으며 물론 뱃길도 있다. 찻길이야 말해 무엇하며 차도(茶道)역시 그러하다. 보이는 길뿐이랴, 보이지 않는 길은 너무 많아서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배움의 길을 시작해서 직장 찾아가는 길까지,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의 달뜸과 연인 만나러 가는 설렘길, 아이의 길과 자람의 길, 그러면서 저절로 누군가의 무엇이 되어 가는 길에 서게 된다. 어른이 되어가다 어느 순간 들어서게 되는 늙음의 길도 있다. 모든 삶의 시간들이 길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단순한 사실은 결과보다 과정에 더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는 증빙이 아닐까.

어느 눈 밝은 시인의 뒤를 따른다. 그가 인도하는 대로 기웃거리다가 길을 잃기도 하며 찾기도 한다.

그렇다. 무수히 많은 길을 ‘걷지 않고 걷는다.’ 걷지 않고 걷는 길이 실제로 걸었던 길보다 더 많고 깊고 푸르르다. 인생길은 마치 사람의 얼굴과 같아서 셀 수가 없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등산하는 것과 같아서 오르면 오를수록 숨은 차지만, 시야는 점점 넓어진다’라고 말한 사람은, 잉마르 베르히만이다.

며칠 전 나의 연천 친구 집. 그녀는 주변 산과 들에서 오갈피 나물, 더덕 순, 취나물과 방풍나물을 추수해서 아름답게 무친 나물을 내놓았다. 커다란 접시에 두 송이의 노오란 민들레와 함께, 오갈피 나물을 한입 먹는데 아! 오! 음! 그 형용할 수 없던 맛은 순전한 ‘봄의 맛길’ 이었을 것이다.

며칠 전부터 다시 읽던 책 <백년 동안의 고독>을 집어 든다. 제독의 걸음처럼 거침없고 강하며 그러나 제독의 걸음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자유로운 세상. 글이 지어내는 길이다. 마콘도, 즐겁고 행복하다가 진지해지고, 잔혹하기 이를 데 없고 사랑은 너무 깊고 많다. 죽음과 삶의 경계는 딱 한 끗 차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우리가 현재 그렇듯이 사는 듯 죽어있고 죽은 듯 살아있다. 이십 대 초반 무렵 처음 접한 이 책이 너무 좋아서 나는 참 나답지 않게(나는 지금도 지갑에 가족사진 같은 것 지니고 있지 않다) 문학사상에서 오린 맨발 벗은 그의 사진을 지니고 다녔다. 내게는 꿈같고 환상 같아 현실이 아니던 이 책을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자신은 현실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않는 글이라고 했다. 어린 나는 그 때 배신감이 들었던가. 그러나 이제는 이해한다. 그의 거침없는 발걸음은 결국 인간의 가장 깊은 근원적인 고독을 향해 질주하는 길이며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을,

이제 기억이 오락가락하시는 늙은 엄마는 딸인 나를 마치 엄마라도 되듯이 그리운 눈길로 바라보신다. ‘엄마 다음 주에도 올께요.’ 해도 내가 마치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처럼 바라보신다. 엄마는 지금 어느 길에 계신 것일까? 엄마가 가는 길을 바라보며 내가 가야 할 길이 더욱 아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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