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낌없이 바치는 신앙

  믿음의 어머니, 이정임 권사를 기리며

그녀의 작은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행정공무원이 되어 받은 첫 월급으로 어머니의 빈 손가락에 금반지를 사서 끼워드렸다. 이제 자녀들도 학업을 마쳤고 각기 장성하여 제 일을 하고 있는 상태니 반지로 헌금을 대신할 일은 없을 터였다. 그녀는 작은 아들이 해준 금반지를 소중하게 아꼈다.

수년이 흐른 후에 작은 아들은 엄마의 손에 반지가 끼워져 있지 않은 것을 알았다. 엄마는 잘 간직해놓았다며 아들을 안심시켰고 아들은 보여 달라고 떼를 썼다. 실상 그녀에게 반지는 이미 없었다. 가엾은 노인이 있어 그에게 꼭 필요한 돈을 반지를 빼어 대신했던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로부터 사실을 전해 듣고 아들은 어이가 없어 웃었다. 다시는 반지 따위는 안 해줄 거라며 엄포도 놓았다. 

그러나 그 후에 작은 아들은 제가 했던 엄포를 무시하고 또 금반지 하나를 엄마 손에 끼워주었다. 다시는 그러지 마시라는 당부와 함께.

그는 어릴 적에 엄마가 손에 끼고 아끼던 금반지를 기억하고 어떻게든 그 추억을 되돌려주고픈 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녀도 그런 아들의 마음을 잘 알았다. 

그로부터 얼마간의 세월이 더 흐른 뒤 그녀는 위중한 병세로 입원하게 되면서 약 6개월의 투병과정을 겪다가 끝내 하늘로 갔다. 죽음을 예견한 그녀가 미리 정리해둔 듯한 소지품 몇 개 중에서 그러나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끝내 반지의 행방은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병세가 중해지기 전 무렵에 그녀는 환한 표정으로 아들을 불러서는 부탁을 하나 했다. 돈 52만원이 든 봉투를 건네며 어디로 송금을 좀 해달라는 것이었다. 노인에게 목돈 52만원은 작은 돈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냐고 아들이 물어도 그냥 부쳐달라고만 하였다. 아들은 어머니의 청대로 돈을 송금하고 더 묻지 않았다. 나중에야 아들은 그 진상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지냈다.

실상 빚을 받을 주인도 받을 빚에 대해 인식을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비단가게를 폐하기 얼마 전에 물건을 도매로 넘기는 이가 물건을 싣고 와서는 하필 그녀의 가게에 짐을 부려놓았다. 그이는 가게마다 물건을 떼어 팔고는 우수리가 남은 물건보따리를 잊고 그대로 남겨둔 채 떠나버렸다. 다음날 그녀가 물건의 주인에게로 전화를 걸어 상태를 알리자 그는 죄송하다며 다음에 갈 때 회수를 하겠노라하고는 몇 달이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전화도 안 됐다.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젠가는 찾아갈 도매상인의 보따리를 가게 한켠에 잘 보관해두었다. 그렇게 세월이 가던 중에 느닷없이 그녀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큰 병원을 쫓아 서울의 아들집으로 그녀의 거취가 옮겨지면서 가게도 이내 남의 손으로 넘어가고 말았는데 그 안에는 그의 보따리도 있었던 것이다. 그녀 홀로 맡아하던 가게의 저간사정을 그녀가 아니곤 모를 일이어서 가게청산에 따른 손해가 컸다. 그녀는 나쁜 기억은 속히 잊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잊혀진 세월이 벌써 십년도 넘었는데 어느 날 말씀을 묵상 중에 돌연 말씀 한 절과 함께 번개 치듯 떠오르는 기억과 마주쳤다. 바로 그 도매상인의 보따리였다!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눅12:59)

그녀는 용돈을 모으는 한편 사방으로 전화를 걸어 그 남자의 연락처를 물색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난지라 모든 연락처가 막혀 있었으나 끈기 있게 알아보는 중에 드디어 그의 거처를 알아내게 되었다. 그의 통장계좌번호도 알아냈다. 그녀가 갑자기 쓰러지는 바람에 가게를 폐하게 된 사실에 대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라 그때 주인이 잊고 두고 간 물건의 값을 치루겠다고 한다면 누구라도 그 돈 받기를 거절하기가 십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돈을 꼭 갚아야 했다.

그녀는 기억을 살려 물건의 품목을 더듬어보곤 현 시세에 맞추어 계산하되 이자까지 넉넉히 보탠 다음 아무런 설명 없이 아들을 통해 돈을 보낸 것이었다.

나중에 아들이 전화를 걸어 그 도매상인과 통화를 하였다. 그는 이정임 이름으로 들어온 돈이 있어서 대체 누구인가 하고 몹시 궁금해 하던 중이었노라고 했다. 아들이 여차저차 상황을 설명하자 남자는 그 돈을 어찌 받겠냐며 펄쩍 뛰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아이고, 권사님 그 양반이 그런 양반이라니까!” 아들은 어머니가 원하시는 일이니 받아 달라하고 전화를 끊었다.

남자의 단발마적인 발언에 담긴 의미는 곧 만인이 동조하는 그녀의 곧은 심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녀는 참으로 윤동주님의 서시(序詩)와 같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원하여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스스로 엄격한 여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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