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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서의 시문학(5)탄식과 구원의 메타포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4.02.09 08:39
  • 호수 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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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신학박사, 기성 천광교회 담임

메타포와 관련된 전승 속에 남아 있는 6개의 명제들은 다음과 같다.

(1) 은유는 한 문체, 명칭과 상관된 담화의 한 상징이다.

(2) 은유는 단어들의 문자적 의미로부터 이탈하여 이름의 의미 확장을 나타낸다.

(3) 이러한 이탈에 대한 이유는 닮음이다.

(4) 닮음의 기능은 동일한 자리에서 사용되었을 문자적 의미의 자리에 단어의 비유 의미를 대체하는 것을 기초하는 것이다.

(5) 따라서 대체된 의미화는 어떤 의미론적 혁신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우리는 은유를 번역할 수 있다. 즉, 비유적 단어로 대체된 문자적 의미를 대체시킬 수 있다. 결과적으로 대체 더하기 복구는 제로이다.

(6) 그것이 의미론적 혁신을 나타내지는 않기 때문에, 한 은유는 실재에 대한 어떤 새로운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담화의 정서적 기능들 중의 한 가지로서 간주될 수 있다.

리쾨르는 은유가 일어나는 장소를 낱말로 보는 고전 수사학으로부터 은유가 일어나는 장소를 문장으로 보는 의미론(semantics)에로 나아간다. 기호론(semiotics)에서 낱말을 기본단위로 보는 반면, 의미론에서는 문장을 의미의 최소단위로 본다. 의미론에서 문장의 의미는 사전적 의미로 환원될 수 없다. 문장의 의미는 그 문장을 이루고 있는 낱말의 의미와 다르다. 문장은 그 자체로 기호는 아니나, 기호를 포함한다. 기호론이 기호들의 내적 관계를 다룬 것과는 달리 의미론은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를 다룬다. 기호는 같은 체계 안에서 다른 기호를 지시하지만, 문장에서의 언어는 그 자체를 벗어난다. 은유 문장의 의미는 낱말들의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오지만 그 은유적 의미는 문맥 속에서 문자적으로 쓰인 낱말들과 대립된다. 은유적 담화의 사건에서 사전적 의미를 능가하는 가치는 “적절치 못한 술어”와 함께 나타난다. 일상의 언어를 파괴할 때 은유는 그것을 다른 차원에서 재구성한다.

단어 차원에서의 은유는 사전적인 규약에 적합지 않은 새로운 이름을 붙여주지만, 문장 차원에서의 은유는 새롭게 야기된 관계에 대해 서술한다. 주로 우리가 사용하는 은유는 하나의 낱말로 은유의 “초점”을 보여주고, 실재의 정의는 은유적인 문장이 ‘구조’ 속에서 어떻게 이 초점들이 변화하는가에 있다.

모든 담화가 하나의 사건으로 만들어지며, 의미로서 이해되는 것과 같이 은유도 사건과 의미라는 이중적 특징을 가지고 있고, 또한 의미와 지시를 갖는다. 리쾨르에게 있어서 은유는 문장의 의미론과 관계한다. 의미론에 따르면 문장에서의 은유의 의미는 문장의 문맥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문장에서의 의미 창조는 은유를 발견하는 능력에 의해 수행되는데 이 의미 창조가 의미론적 차원의 은유이론에 있어 가장 중요하다. 이와 같은 창조적인 의미 생산을 리쾨르는 “의미론적 혁신(semantic innovation)”이라고 부른다. 리쾨르에 따르면 의미론적 은유론에서 은유의 장소는 낱말만도 문장만도 아니다. 즉, <단어→문장→문장과 단어 사이>의 구조 속에서 은유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은유에 대한 문장론적 이론은 세 가지의 본질적인 요소를 갖는다.

(1) 은유적 문장에 있어서 한 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할 때(substitution), 이전에 우리가 알지 못했던 면을 드러내 주는 긴장(tention)이 생긴다.

(2) 은유는 담화 사건 안에서 일어나는 문장론적 혁신으로서 문자적 불합리성으로부터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

(3) 은유는 단순히 비은유적인 언어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 준다.

2) 은유와 해석학

리쾨르는 텍스트 차원의 은유를 논한다. 텍스트 차원에서 은유를 논한다는 말은 이것이 해석학의 차원이라는 말이다. 이때 텍스트란 쓰인 작품이고, 작품의 의미와 지시를 갖는다. 은유는 문장 차원에서뿐 아니라 텍스트의 차원에서도 의미와 지시를 갖는다. 리쾨르에게 있어서 지시는 이중 구조를 가진다. 일차적인 지시는 문자적 지시이고, 이차적 지시는 은유적 지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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