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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서종표 목사 - 4無의 삶을 산 김용은 목사(42)김용은 목사님께 목회를 배우다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4.01.24 20:43
  • 호수 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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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목사

1983년 8월 서울신학대학을 졸업하면서 앞으로 어떻게 사역을 할까 기도하다 먼저 존경하는 김용은 목사님께 목회를 배우고 싶은 마음을 가졌습니다. 기도 응답이었는지, 동년 9월 군산 중동교회 전도사로 부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김동일 목사(군산삼성교회)

김 목사님과 만남이 시작되었습니다. 오전 9시 조회, 오후 석회(5시 30분, 또는 6시), 하루 두 차례 교역자 모임을 가졌습니다. 예배를 잠시 드리고, 하루의 사역에 대한 대화를 나누며, 석회 시간에 보고를 하였습니다. 당시 중동교회는 중·남·서·동의 4교구가 있었습니다. 나는 서교구를 맡았습니다. 서교구는 시내 중심 지역이었습니다. 하루 종일 심방을 10 가정 정도 다녔습니다. 걸어서, 또는 자전거로 다녔습니다. 그런데 교구 사역이 사역의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대학부와 학생회를 맡겼습니다. 그래서 매 주일 대학부, 학생회 설교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매주 1회 새벽기도 설교와 새벽기도 인도를 해야 했고, 한 달에 1번 저녁 예배와 유초등부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오전과 오후에는 목회자 모임과 심방을 하여야 했고, 저녁에는 설교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쉴 틈이 없었습니다. 석회를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 파김치가 됩니다. 너무 너무도 피곤한 하루하루였습니다.

이후로부터 저는 목사님의 사랑을 듬뿍 받게 되었습니다. 제가 부르는 찬양 인도를 마음에 들어 하셨습니다. 그리고 1부 예배 시간에 찬양대가 없어서 대학부 중심으로 ‘벧엘 성가대’를 만들어 제가 지휘를 하고, 저의 아내가 반주를 하였습니다. 지휘를 마칠 때마다 목사님이 할렐루야! 큰소리로 외치면서 너무 좋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십자군 전도대 사역으로 잠시 중동교회를 사임하였는데, 십자군 전도대를 마치면서 목사님께서 다시 중동교회에 부임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제가 인도하는 찬양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새벽기도 시간에 저는 목사님의 진한 눈물의 기도를 목격하였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새벽 기도실 제일 앞쪽에 앉으셨습니다. 그날 제가 새벽기도 담당이어서 예배를 인도하러 앞으로 나갔는데, 목사님께서 눈물, 콧물을 흘리시며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목사님께서 순교자의 가족인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가족을 잃은 아픔과 상처가 목사님께 남아있는가 보다 생각을 하였습니다. 물론 그 눈물은 상처에 대한 한의 눈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격의 눈물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목사님의 눈물을 보면서 참 위대한 목사님이시구나 생각이 되면서 더욱 존경심이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가 사역할 때에는 지금처럼 장례식장이 없어서 돌아가신 성도님들의 장례 일체를 목사님이 주관하셨습니다. 예배 뿐 아니라, 입관할 때 염까지 직접 하였습니다. 전도해서 세례를 주고, 직분을 주어 한평생 목사님과 고락을 함께한 성도님을 그냥 보낼 수 없다 하여, 목사님께서는 성도님 한 분 한 분을 정성을 다해 염을 하시고, 장례를 치러 주셨습니다. 목사님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듯하였습니다.

당시 교회 건너편 지역은 중동이란 지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일명 중동 골목으로 소개되었는데, 골목길이 워낙 좁고, 복잡해서 도둑이 한번 들어가면 잡을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대심방을 다니는데, 제일 앞에는 심방 담당 교역자, 다음에는 목사님이, 그다음에 목회자와 심방 대원이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발걸음이 워낙 빠르시고, 골목길이 복잡해, 나이가 드신 권사님들이 미처 심방 가정을 찾지 못한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찬송 소리가 나면서 비로소 심방 가정을 찾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목사님께서 검정 한복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실 때는 워낙 빠르게 걸으셔서 두루마기 겉옷이 부딪치는 소리가 상당히 크게 들릴 정도였습니다.

사역에 대한 열정을 가지신 목사님의 뒤를 따라가기가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목사님은 부교역자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킨다는 말이 있었는데, 소문 그대로 정말 너무도 힘든 사역이었습니다. 목사님께서는 성도님들을 일일이 심방하는 것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일반 심방은 교구를 맡은 부교역자들이 하고, 대 심방은 신년 심방, 봄, 가을 심방이 있었는데 신년 심방은 목사님이 주관하시고, 봄, 가을 대 심방은 교구 교역자들이 주관하였습니다. 대 심방 때는 하루에 20가정 정도 심방을 다녔습니다. 찬송 두 장 부르고, 말씀 전하고, 기도하고,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그리고 먹을 것은 싸 가지고 나옵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하였습니다. 저녁에 돌아오면 완전히 쓰러집니다. 교구 대 심방 때가 되었는데, 중 교구를 맡은 사역자가 금식기도를 하는 바람에 제가 그 교구까지 심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달에 500가정 정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계속되는 심방을 하루에 많게는 20가정 정도를 하였습니다. 이 때 72kg 나가던 체중이 62kg가 되었습니다. 심방도 심방이었지만, 저녁에 설교준비를 해야 했고, 주일에는 설교나 모든 예배를 드려야 했습니다. 너무 피곤해서 새벽기도 시간에는 졸기가 일상이었습니다. 피곤하다는 소리를 매일 달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소문으로만 들었던 김용은 목사님의 실체를 경험하는 현장이었습니다.

목사님을 추억하면서, 존경하는 목사님과 함께했던 시간은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었던 아주 귀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이었습니다. 어떤 지인이 말하기를 목사님과 제가 닮은 부분이 많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볼 때는 전혀 닮지 않았는데, 설교 스타일도, 제스처도, 목소리도, 심지어는 걸음걸이도 얼굴까지 닮았다고 합니다. 존경하는 목사님을 닮았다는 것은 기분이 매우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목회를 하면서 훈련받았던 것들이 목회 현장에서도 아주 유용하게 활용되었습니다. 오늘의 제가 있는 것은 먼저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김용은 목사님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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