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영 사모(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연천 쪽으로 나들이를 다녀오던 길이었어. 임진강에 연하여 만든 넓은 공원에는 댑싸리가 가득 심어 있는데 벌써 단풍이 불그레 들어가더군. 댑싸리는 둥그레한 것이 마치 묘 같기도 공룡 알 같기도 하지. 일년생 풀인데 어쩌면 저렇게 잘 자라나는지, 댑싸리 외에도 단단하게 어여쁜 백일홍, 칸나와 노랑 코스모스, 보라색의 버베나가 어우러져 가을의 향연이 되어 있었어. 가을은 사실 쓸쓸하고 적막한 시절인데.... 다른 어느 계절보다 더 푸르른 쪽빛 하늘이라니. 단풍도 그렇고 꽃들도 그렇고....언니, 가을이 저리 화려해도 되는 거야? 언니에게 묻고 싶었어. 그러면 언니는 뭐라 대답할까, 언니, 그곳에서 잘 있는 거지? 여전히 그 선한 미소를 지으면서, 어느 사람에게도 착하기만 하던 그 성품대로 잘살고 있는 거지?

돌아오는 길에 임진강 강가에 있는 호로고루성을 들렸어. 어떤 멋진 건물보다 좋아서 일부러 가기도 하고 그쪽에 가는 길이면 돌아서라도 꼭 들려 오곤 했는데 이제는 사람이 너무 많아졌어. 마침 해가 저물 무렵이라 사람이 없겠구나! 생각한 거지. 야트막한 토성에 삼각 지형의 작은 땅을 거느린 고구려 시대의 성이야. castle이라고 하지만 城에 대한 인식을 깨는 성이라고나 할까, 城의 뜻이 ‘넘보지 마’ 라고 한다면 어쩌면 호로고루성은 ‘어서 와’ 손짓하는 것 같아. 야트막한 돌무더기 위 흙으로 덮인 담. 계단 몇 개면 다 올라갈 높이의 부드러운 곡선이 아주 근사하지. 임진강은 그 작은 토성을 껴안고 흐르고 있어. 어느 때는 조금 넓게 어느 때는 좁게, 고구려 시절에도 이런 모습으로 변함없이 흐르고 있었을 강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느낌, 세상의 소란스러운 것들이 잦아들고 그것들에 휘둘려 애면글면했던 일들에 거리가 생긴다고나 할까,

어느 순간 해가 살짝 서쪽 산 뒤로 내려갔어. 그렇다고 어둠이 급작스럽게 다가오지는 않아. 해는 사라졌지만, 하늘에는 해의 여진으로 인해 어두운 블루가 다가와. 해가 진 직후 가장 신비로운 시간이 다가온다고나 할까, 낮과 밤이 교대하는 시간, 그 사이, 그 틈을 오래전 사람들은 ‘이내’라고 불렀어. 해는 없지만 밝음이 남아있고, 밤이지만 아직 어둠이 머뭇거리는 시간, 호로고루의 이내 속에서도 언니 생각이 나더군. 가을이라서 그럴 거야. 언니도 무척 가을을 좋아했잖아. 특히 처서와 백로 사이, 고등학교 때 훔쳐본 언니의 일기장, 처서에 대한 글은 잊히지 않아, 초가을처럼 상큼하던, 마치 잘 익은 사과를 나무에서 바로 따 베어문 것 같은 느낌의 글. 내가 포도순절을 좋아하게 된 것도 아마 언니 탓일지도 모르지.

가상의 개념이지만 웜홀은 회전과 회오리 속에서 생겨난다고 해. 시공간을 잇는다고 해서 '시공간 통로'라 고도하는데 지금 언니와 나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도 웜홀이 아닐까, 언니의 부재가 만들어준 사랑과 그리움으로 빚어낸 웜홀.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정말 놀라운 시간에 대한 개념 아닌가.

조앤 디디온의 <푸른 밤>은 상실의 서야. 딸 퀸타나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의 슬픔, 그런데도 세상은 그저 무심하게 흘러가는 외로움을 적은 글인데 뉴욕에는 하지 무렵 푸른 밤이 있다고 해. 해가 저물면 어스름이 다가오면서 세상이 푸르러지는 시간, 푸른 밤이 사라질 무렵 마치 갠 날 샤르트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같은 블루가 시작되는 격렬한 밤. 그녀는 그 시간이 딸 퀸타나와 함께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어. 변함없는 시간이 상실 때문에 사라졌다고 생각하는 것. 나는 거기서 그녀만의 고통과 은유를 읽었지. 세상은 어느 누구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짝 안 하지. 그 냉정함 속에 존재하는 무서운 고독이라니, 고독은 마치 생명처럼 삶의 밀도와 관련이 있어. 언제나 존재하며 끊임없이 우리 삶에 중력을 행사하는 존재. 어느 순간 아주 웅혼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지. 그러나 그 고독 때문에 또 견딜 수 있는 게 아닌가, 아, 삶은 그저 쓸쓸해, 쓸쓸할 뿐이야.

생각해보니 쓸쓸한 가을도 이리 아름다운데 언니가 옮겨 간, 우린 감히 넘볼 수 없는 그 높은 세상은 더 아름답겠지. 더 찬란하겠지. 더 눈부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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