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정 목사(기성 복된교회)

명절, 잘 보내셨지요?. 배고픈 시절의 명절은 음식에 집중했지요. 만, 지금 명절이 제일 가치 있는 건,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본다는 점입니다. 농경사회의 가족이 모여 살던 시대와 달리 각자의 일터가 따로 있어 흩어져 사는 시대거든요. 명절에 멀리 떨어져 살던 가족들을 만나는 해후는 늘 즐거움으로 들뜨게 합니다. KTX 열차를 비롯해서, 오가는 교통수단도 많이 발달해서 그리운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서울도 지척인 시대입니다. 꼭 그리 원활한 길이 아니어서 전국 도로가 주차장 될 만큼 답답한 상황에서도 해마다 설, 추석에는 고향을 찾고 그리운 사람들을 찾습니다. 그리운 사람들과의 해후는 어떠셨어요? 정답기도 하지만 설핏 섭섭도 함께 가는 게 인간사이니 그런저런 사연으로 더불어 사는 사람을 든든한 재산으로 삼읍시다.

가객 ‘송창식’은 ‘미당’의 시를 빌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라는 노래로 지어 부릅니다. 그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다 보면 푸르름에 단풍이 들고, 눈이 내리면 어쩌느냐 능청과 만납니다. 그 노래의 정점은 그리움이 사위어 네가 먼저 죽든지 그리워하는 내가 죽는다면 더 그리워할 수 없으니 지금 눈부시게 푸르른 날 마음껏 그리워하자. 뭐, 그런 노래입니다.

연로하신 장모님의 사위 사랑이 지극하십니다. 잠시 우리 집에 모시고 살다가 노환이 깊어지시니 처남들이 요양원에 모셨습니다. 거길 다녀온 각시는 ‘엄마가 사위 보고 싶으시대요’ 합니다. 여든여덟이나 되신 지금도 사위를 만나면 소녀처럼 수줍어하시고, 남달리 좋아하십니다. ‘목사님 중에는 우리 사위 목사님이 제일 잘 생겼어’라고 말씀도 하시지만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니라 꼭 그리 믿으시는 장모님이십니다. 스승의 날에는 30만 원이나 봉투에 담아 주시던걸요. 그 다정하신 마음을 잘 아니 요양병원에 가신 지 한 달, 행여 기다리실 마음이 짐으로 남다가 적당한 월요일을 틈내 한걸음에 다녀왔습니다.

휠체어에 앉아 잘 갖춰진 요양원 로비로 내려오셔서 면회합니다. 많이 야위고 기력이 쇠약해지셨습니다. 희로애락을 넘어선 표정이지만 다행히 정신은 맑으십니다. 두 따님에다 가까이 사는 손자까지 한 부대가 찾아갔으니 매우 반가우실 장모님이신데 멀뚱히 먼 산 바라기이십니다. 10분쯤 표정 없이 앉아 계시더니

“나 들어가 누울래, 힘들어, 잘들 가, 먼데 또 오지 말고”

노루 꼬리 같은 시간으로 그리움이 채워지지 않았을 테지만 쉽게 돌아서십니다. 서너 시간 운전하고 찾아간 보람도 무색하게 눈치 빠른 요양보호사는 재빠르게 휠체어를 조정하여 엘리베이터에 오릅니다.

아! 그리움도 유효기간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쇠고 쇠면 굳어 버리는 모양입니다. 두어 달 전만 해도 두 따님과 얘기가 자별하셨습니다. 사위한테도 ‘밥은 집에 와서 먹으라’는 등 뜻 없이라도 이런저런 말씀이 늘 하고 싶으셨지요. 낮에 주간 보호센터에 다녀오시면 우리가 들어갈 때까지 홀로 계십니다. 그리 길지 않은 그리움의 시간을 건너서 만나면 일과를 다 쏟아내시느라 말씀을 많이 하셨지요. 그런데 그런 그리움의 유효기간을 슬쩍 넘어서서 당신은 무념무상의 지대로 진입하신 모양입니다.

짧게만 허락되는 중환자실에 급히 면회 다녀오신 가족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래도 나를 알아보시더라’며 그리움의 끝자락을 붙들고 안타까워합니다. 이미 생존의 한계 시간을 넘어서신 분들, 기억 장치가 하얗게 비어 가시는 어르신들, 평생 사용한 뇌가 그 기능을 놓아 목숨보다 귀하던 자식들조차 인지 영역 밖으로 밀어내실 때, 평생 나를 그리워하셨을 부모님을 이제는 내가 진심으로 그리워해 드려야 합니다. 마지막 남은 그리움의 온기마저 멀뚱한 눈망울로 스러져 가시는 분들이 늘어갑니다. 아직 남아 있는 그리움은 생명 징후입니다. 자주 아니더라도, 푸르름이 지쳐 단풍으로 지고, 그 위로 흰 눈이 덮이다가 새봄이 오기 전에 너나, 내가 스러져 가기 전까지 그리운 사람들을 그리워하며 삽시다. 그 그리움의 진심이 온기로 닿게 합시다. 명절 끝자락, 휘둘러 다녀간 뒷자리의 부모님들은 잠시 누린 혈육의 온기에 그리움의 공간이 더 넓어져서 허망하실 겁니다. 실천적으로, 이 10월에는 또 휴일이 들었으니 그 그리움의 자리를 한 번 더 채워 드리는 건 어떨까요.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