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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닭의장풀에 관하여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9.07 21:06
  • 호수 5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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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매화 가지를 꺽다가 마침 인편을 만났소/한다발 묶어 그대에게 보내오/강남에서는 가진 것이 없어/가지에 봄을 실어 보내오> 육개가 살던 강남에서 벗인 범엽이 살던 동네까지 이르면 꽃은 이미 시들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마 가지만 남아있을 터. 오히려 시들은 가지를 보며 아름다운 매화를 연상하지 않겠는가,

사라져버린 꽃처럼 더 깊은 우정을 생각하지 않았을까, 무엇보다 가난하여 오히려 아름답고 서정적인 우정이 더욱 돈독해지지 않겠는가. 이른 봄 탐매 여행을 떠났을 때 매화에게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꽃만 매화랴, 나무를 보고 매화를 상상하는 것도 범엽처럼 무척 괜찮았다. 매실은 매화가 아니라는,

진짜 매화꽃은 위로 피어나고 매실은 아래로 꽃이 핀다는 것, 그래서 매화는 바라보는 나무이지 열매를 위한 나무가 아니라는 것,

염하에 식물탐사를 두 번 따라다녔다. 한번은 선정릉으로 그리고 또 한번은 여의도 샛강으로, 쉼 없이 흐르는 땀이 온몸을 적시는데 두 시간여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아는 것도 좋지만, 모르거나 자주 만나지 못하는 꽃을 만날 때의 신선함이야말로 식물탐사의 백미다. 여름은 꽃이 귀한 시절처럼 보이지만 풀숲에는 수많은 꽃이 피어나고 있다. 열매 맺지 않는 식물은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꽃이 핀다는 말이다. 꽃 없는 식물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름다운 꽃 역시 풀이 아니던가, 민초인 우리 역시 잡초가 아니런가,

여름 숲에 가장 흔하게 피어난 꽃이 아마 닭의장풀일 것이다. 짙은 초록 잎 사이에서 피어난 꽃을 백과사전에는 흔하게 하늘색이라 표기되어 있으나 하늘색은 아니다. 그보다 더 짙은 파랑, 그러나 그 파랑도 적절치는 않다. 맑은 쪽빛을 가득 담은 파랑이라고나 할까,

아주 어릴 때 살던 집에 돼지 막과 닭장이 있었다. 돼지를 새끼 내서 키우고 닭장에는 닭이 살고 있었다. 어느 땐가는 마당에 어미 닭과 병아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함께 다녔고 오후쯤 되면 집으로 들어갔다.

그 닭장 곁에 여름이면 수북하게 닭의장풀이 솟아났다. 지금은 닭의장풀이나 달개비라고 부르지만, 복숭아를 복송, 오이는 외, 하듯이 단어 줄이기를 좋아하는 내 고향에서는 그냥 닭장풀이라고 불렀다.

어릴 때 무슨 꽃이 아름다운 것을 알겠는가, 이름대로 닭장 곁에 피어난 풀이었다. 그런데 이제 닭장풀이 아름답다. 그것도 사무치게 아름답다. 거의 모든 오래된 것들이 우리를 감동하게 하듯 오래전부터 봐온 꽃들에는 지나가 버린 아득한 시절이 어려있기 때문이다. 시절과 함께 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닭의장풀은 시원하고 소슬한 모습이다. 여름 더위 속 서늘한 기운을 배경으로 살짝 초록과의 사이에 여백을 만들며 꽃대궁이 포 사이에서 푸르르게 솟아난다. 포에서 살짝 일어서듯, 그래선지 핀다기보다는 솟아나다가 더 어울린다. 푸른 꽃잎 두 장이 주인공처럼 보이지만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비의 더듬이를 닮은 노오란 수술 두 개가 솟아나 떨잠처럼 흔들리고 있다. 그제야 밑에 솟아난 하얀 꽃잎도 하나 보인다. 아침에 피었다가 지는 꽃이라 데이 플라워라고도 한다. 그래 설까, 순간의 즐거움이란 꽃말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천 날도 누군가에게는 하루가 될 수 있으니. 하루라 하여 굳이 애달플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이별을 담고 만나는, 슬픔의 정한이 있는 꽃, 저 푸른 꽃잎을 짓이겨 잉크를 만들어 사랑하는 이에게 편지를 썼던 이는 누구던가, 사랑의 이면이 그러하듯 서정적인 편지에 어린 잔인함이라니, 실제 푸른 잎은 염료의 기질이 있어 종이는 충분히 물들인다고 한다.

소동파가 좋아하는 꽃이었어요. (소동파는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다.) 아니 왜요? 꺾어다가 수반에 꽂으면 선을 이뤄가며 자라는 모습이 아름다워서요. 꽃이 피는 대나무라고 불렀지요. (아 그렇지 소동파는 대나무를 아주 좋아한 사람이었어. 쓸모도 많지만 아름답다고.)

글을 쓰면서 검색해보니 닭의장풀을 좋아한 이는 소동파가 아니라 두보였다. 소동파면 어떻고 두보면 또 어떤가, 그래서 나도 흉내를 내보았다. 지인의 세컨드 하우스에 갔는데 자갈 많은 땅을 기어가며 닭의장풀이 솟아나 있었다. 이게 두보가 좋아했던 꽃이래요. 한 가지를 꺽어 커피를 마시고 난 투명 플라스틱 컵에 꽂았다. 오메, 그 선이 제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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