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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서종표 목사 -  4無의 삶을 산 김용은 목사(29)김용은 목사님과 만남의 축복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8.24 18:50
  • 호수 5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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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은 목사

그땐 지금처럼 선거관리 위원회가 없어 입후보자 등록 없이 은밀히 선거운동이 진행되었고, 임원 선거 차례가 되면 수백 명의 대의원들이 기표소에 일렬로 서서 들어가 받은 백지에 아무 이름이나 적었다. 그러면 서무부원들이 모든 표를 모아 하나씩 후보 이름을 부르면 다른 서무부원이 칠판에 바를 정(正)으로 기표하던 때여서 희비가 엇갈리는 긴장감도 있으나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흠이었다.

놀라운 것은 총회장 선거 때부터였다. 뚜껑을 열고 보니 서울의 황 목사(보수)와 전남의 김 목사(진보)의 대결인데, 헌법에 따라 누구도 2/3표를 받지 못해 재투표에 들어갔다. 그러나 결과가 1차 투표 때와 별다름 없이 팽팽히 맞서 3차, 4차 진행하자 지루했다. 양측에서 협상도 한 듯해서 투표는 5차, 6차, 7차까지 진행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그때 어느 회원의 긴급동의가 채택되었다. 이대로 계속 투표해봤자 표의 이동이 없으니 증경총회장들로 수습위원회를 삼아 양측 협의를 시키든지, 그래도 안 되면 대안을 제출하여 총회의 결의로 시행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습위원회가 노력했으나 양측이 요지부동이어서 할 수 없이 두 후보를 사퇴시키고, 대안으로 김용은(보수)과 한○○(진보) 두 분을 지명하여 총회에서 투표했다. 그 결과 김용은 목사 표가 단번에 2/3선이 넘어 총회장으로 당선되어 대의원들의 우렁찬 박수를 받았다.

필자는 이때 처음으로 김용은 목사님을 멀리서 뵈었다. 필자는 당시 안수 받은 지 겨우 2년 차 햇병아리나 다름없어서 김용은 목사님이 보수라는 것에 기표했으나, 당선된 김 총회장님을 만나 뵙기에는 하늘의 별처럼 너무나 멀고 크신 분이셨다.

2. 가까이에서 본 김용은 목사님

10여 년이 지난 1982년 6월 하순 무렵에 필자는 인천 주안교회의 건축을 마치고 헌당식을 한 후, 교회당 채우기 운동을 하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총회본부의 부름을 받아 그해 7월 1일부로 교육국장에 부임하여 교단 교육의 새롭고 알찬 진흥을 위해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1983년 1월 중순 어느 날, 김용은 목사님이 앞장서서 원로급인 전 총회장 두 분과 중진인 김성호 목사 세 분을 모시고 총회본부를 방문하셨다.

그래서 당시 교단 총무 이봉성 목사님과 장시간 회담을 하신 후, 총회 후원으로 이명직기념사업회를 발족하기로 협의했다. 그리고 필자를 불러, 이 사업을 행정적으로 적극 지원하도록 했다. 이때 공식적으로 필자는 김용은 목사님과 동반한 원로 목사님들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드렸다. 그래서 먼 곳에 계신 김용은 목사님을 뵙고 가깝게 모실 수 있었다.

1) 이명직 목사 기념사업회 태동 경위

1973년 4월 2일, 한국 성결교단의 큰 지도자이신 이명직 목사님의 장례식이 교단장(葬)으로, 서울신학대학교 교정에 대형 흰 천막을 치고 진행하였고, 각 교단 대표들이 초교파적으로 10여 명 참석한 분 중에서 장로교 한경직 목사님의 조사가 가장 감동적이었다. “이명직 목사님은 성경에 기초한 복음주의 신앙인으로 그리스도와 오직 그 십자가만을 자랑하였으며, 특별히 한국성결교회에 있어서는 교조(敎祖)로 존경받습니다. (후략)”

이날 장례식에는 400여 명이 참석하였으나, 제2회 추모행사부터는 가족 중심으로 교단 원로급 목사들을 설교자로 한 분씩 초청하여 조촐하게 행하였다. 제2회 추모식 설교자로 초청받은 김용은 목사님은 이때부터 이명직 목사님에 대해 은사로써 각별한 존경심을 가지고 그 후 추모행사 때마다 반드시 참석하여 상당한 부의금을 통해 유족들을 계속 격려했다. 이에 감동한 유족들이 김 목사님을 추모행사의 고문으로 모시고 상의했다. 그래서 이후 추모행사는 김 목사님의 지도로 차질 없이 잘 진행되었다.

어느덧 추모식 10주년을 위해 준비를 하던 김 목사님은 기도 중에 큰 결심을 한다. 한국성결교회의 교조이고, 사부(師父)이신 고 이명직 목사님의 추모식을 가족에게만 맡겨 초라하게 치를 수 없다는 하나의 책임 의식을 느꼈다. 그가 1983년 1월 어느 날, 군산에서 상경하여 선배인 김정호, 황경찬, 오영필 목사님 댁을 차례로 방문하여 그의 뜻을 전하자, 크게 격려와 힘을 얻었다. 그는 중진 목사 대표로 평소 절친한 김성호 목사의 협조로 일주일 후 그들과 함께 총회본부를 방문하여 교단의 협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그해 2월 18일 ‘이명직 목사 기념사업회’ 발족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취지문을 작성한 후, 고 이명직 목사와 친분이 있는 교역자나 평신도 지도자 80명을 선정하여 1차로 공문을 발송하는데 필자가 협력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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