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정 목사(기성 복된교회)

농촌에서 자랐습니다. 자연 농사일도 제법 익숙하지요. 이맘때는 여기저기 농약을 줍니다. 손으로 작동하는 수동 펌프식 살포기를 짊어지고 농약 주는 일을 마치면 전신이 흠뻑 땀에 젖습니다. 중노동입니다. 몸이 힘든 것보다 더 큰 위험은 농약 중독입니다. 한낮 더위에 쉬지 않고 농약을 살포하다 더위와 약 기운에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가는 경우가 심심치 않았으니까요. 지금은 ‘드론’으로 그 일을 해낸다니 다행스럽습니다.

농약 사고는 그뿐 아닙니다. 농약을 물로 오인해서 벌컥 마시고는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라목손’이던가, 농약 이름은 기억에 희미한데요. 맹독성인데 반해 물에 희석하기 전까지는 그냥 무색무취로 맑은 물입니다. 자칫 물로 오인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후에 인명 사고 방지용으로 색을 넣었다는 소식은 진짜 뉴스였는지 내 ‘뇌피셜’인지는 기억에 희미합니다. 50년이나 된 일이니까요.

치명적인 독을 가진 농약이 독한 냄새도 구별 할 색깔도 없어서 위험한 것처럼 인생을 망가뜨리는 치명적인 죄가 있습니다. 무색무취의 죄, 교만입니다. 윤리 도덕적인 죄들, 일테면 도둑질, 거짓말, 음란 등의 죄는 양심에 통감을 줍니다. 그런 죄를 지으면 악취가 납니다. 양심의 가책이 옵니다. 눈에도 표시가 나고 가슴에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주의하여 치사량의 죄를 짓지 않습니다. 또 죄가 들어오면 표시가 나니까 대책을 세우기도 합니다.

교만의 죄는 그런 감각이 없으니 무색무취라고 비유하는 겁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스스로 교만하여 나를 남보다 높이 두려는 의지로 살지는 않습니다. 그게 죄인 줄 아니까요. 이 시대의 교만은 나를 지나치게 신뢰하는 현상입니다. 내가 옳고, 내 판단이 정확하기에 나의 정당성을 포기할 수 없는 상태거든요. 스스로 정해 놓은 기준안에서 내가 옳다고 여기니 양심이 발동할 겨를이 없습니다. 내가 정당하니 대립적으로 상대가 부당하기 일쑤지요. 나의 정당함을 더욱 강화함으로 상대방의 부당함을 드러내는 행위가 더 정의롭게 느껴집니다.

교회는 최소한 윤리, 도덕적인 죄는 비켜선 사람들이 주류를 이룹니다. 스스로 정당하다는 자기 훈련으로 무장 된 사람들끼리 모인 교회는 한 번 대립이 시작되면 도무지 봉합할 기회가 없습니다. 모두 자신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교만이 똬리 틀고 있는 까닭입니다. 무섭지요. 시간을 많이 소모하거나 자신을 전혀 객관적인 자리에 놓을 수 있는 기회가 다행히 있으면 그때야 비로소 그게 부당한 일이었음을 발견는 정도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마5:37) 함으로 지나친 자기 정당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생활 중에나, 가나안 정착 이후에도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당하는 이유는 두 가지 죄, 교만과 우상 숭배였습니다. 이스라엘 안에 종교적 기준이 되는 제사장, 서기관 등이 율법적 기준에서 스스로 옳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경건하고 거룩하게 처세하지만 후에, 회칠한 무덤 같다는 책망을 받을 만큼 자기 정당성의 교만으로 가득했습니다. 종교적 정당성을 지키기 위해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피해가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이어받지 않아야 할 텐데요.

긴 역사 동안 무색무취의 죄인 교만과 우상 숭배로 사람을 망가뜨려 온 어둠의 영들은 그 전략을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하여 교회 안에 교묘한 우상 숭배도 여전합니다. 자신을 신뢰하는 게 우상입니다. 실제 생활에서 성경적 가르침보다 내 판단을 앞세우는 현상들은 끊임없이 체험됩니다. 소위 ‘상담’을 원하는 사람들 중에는 성경에 반하는 자기 결정에 목회자가 동의 해주기를 바라는 과정인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우상입니다. 돈을 신앙생활보다 우선된 가치로 여겨, 돈 버는 일로 신앙생활 소홀할 수 있는 정당한 이유를 삼는 게 우상 숭배입니다. 지금도 그 죄의 독성은 여전합니다. 하나님은 돈 보다 앞세워 섬겨야 할 가치이십니다. 오래 자본주의 문화에서 살다 보니 그야말로 자본, 즉 돈을 위한 수고는 하나님을 위한 헌신보다 앞선 가치로 인정되는 타성에 젖었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그 저지르고도 모르는 무색무취의 죄가 패망으로 이끌어가는 맹독성 독약인 것은 변함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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