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영 목사(임진각 순례자의 교회 담임)

“문학과 지성사”에서 출판한 “김영규”님의 「이젠 없는 것들Ⅰ」에서 옮겨 봅니다.

한 집안 식구가 3대로 되어 있을 때, 집안의 제일 큰 어른은 당연히 할아버지와 할머니였다. 그 중에도 가족 사이에서 할머니가 갖는 구실이며 비중은 대단했다. ‘안방마님’의 자리를 누린 셈이다. 한 집안의 가장 큰 안주인이면서 곳간 열쇠를 거머쥔 사람 역시 으레 할머니였다. 그러나 그 권위가 넘친 안방마님도 손자에게는 자상하고 정겹기가 이를 데 없었다. 집안일에 쫓기는 어머니가 미처 베풀지 못하는 관심과 사랑을 할머니가 채워주고 챙겨주었던 것이다. 어느 가정이나 아이들 다독거리기로는 할머니의 사랑이 어머니의 몫을 훨씬 웃돌았다. 할머니 정 다르고 어머니 정이 다르기도 했지만 부드럽고 다사롭기로는 아무래도 할머니의 정이 앞섰던 것 같다. 할머니의 손자 손녀에 대한 사랑이 한 집안에서 가장 큰 사랑이었던 것이다.

할머니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다사로운 그 품이겠지만, 무릎도 이에 뒤지 지는 않을 것이다. 초저녁, 맏손자가 졸라서 할머니는 오늘 밤에도 또 옛날 얘기를 풀어놓는다. “옛날, 옛날, 그 옛날에……” 손자 녀석은 그 무릎을 베고는 팔과 다리를 쭉 뻗는다. 할머니 무릎베게는 왜 그리도 폭신하고 따뜻한 걸까? 이전에도 여러 번 들었던 얘기, 줄거리가 빤한 그 얘기에 빠져들다 보면 손자의 눈꺼풀은 시나브로 무거워져간다. 그리고 어느새 새록새록 꿈속에 빠져들게 된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방식으로 할머니들을 통해 삶의 유산을 물려받았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유산도 물려받았습니다. 어린 시절, 방학 때 다녀온 할머니 댁에서의 일입니다. 매서운 태풍이 불어온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천둥과 번개에 놀란 가슴은 얼음처럼 굳어져 한 발짝도 나설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께서 용감하게 우산을 펴들고 길을 나서시는 것이었습니다. 모기 소리만한 목소리로 할머니를 만류해 보았습니다. “할머니 번개 맞으면 큰일 나요. 지금 나가시면 안되요.” 하지만 할머니는 “죄 지은 사람들이나 번개 맞지 예수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는 거여.” 라며 우레 소리 같은 커다란 말씀을 남기시고 총총히 사립문을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그 기개는 마치 여리고성을 바라보며 외치는 여호수아와 같았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할머니의 깊은 믿음이 제 가슴에 그렇게 아로새겨지며 들어왔습니다. 여름 한날, 비를 맞고 감기가 들었는지 고열로 밤새 잠을 잘 수 가 없었습니다. 이때 할머니가 베어준 무릎은 그 어느 베게보다 포근했습니다. 그리고 들려주신 할머니의 찬송 소리가 지금도 아른거립니다.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또한 4살 때쯤, 어머니를 따라 갔던 예배당에서 무릎 꿇고 눈물로 기도하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기억납니다. 어머니 무릎에 파고들던 나를 안고 기도해주시던 그 모습은 오늘 내 모습이 되어 내 아이를 기도하며 안습니다. 부모님으로부터 내려 받은 신앙 참 귀한 것이었습니다. 할머니와 어머니께서 물려주셨던 그 신앙은 여전히 제 아이들에게도 전수되고 있습니다. 바울의 후계자였던 디모데도 할머니와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습니다.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딤후 1:5)” 오늘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더 많이 생각나는 날입니다. 그렇게 할머니와 어머니께 배웠던 때가 그리울 뿐입니다. 한국교회의 부흥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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