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영 목사(임진각 순례자의 교회 담임)

『황석영의 밥도독』(출판:교육서가)에서 일부를 발췌하며 상념에 젖어 봅니다.

남정네들이 집 부근의 논이나 밭에 나가 일하는 동안에 아낙네들이 대광주리나 채반에 밥과 반찬을 얹어 나르던 일은 오래된 행사였을 터이다. 한 마을에서 집집이 돌아가면서 여럿이 농사일을 협동하여 서로 해주는데, 이때에 새참이나 끼니도 공동으로 해결하였다. 비록 햇보리밥에 제철 푸성귀뿐이었지만 인심은 풍성하여, 일하는 남정네는 물론이고 부엌일을 거드는 노약자나 집에서 놀던 어린것들까지 손목 잡혀 나와서 함께 먹었다. 그뿐인가. 지나는 나그네라도 보이면 서로 손짓하여, 들밥 좀 같이 자시고 쉬어서 가시라고 불러대는 것이었다. 이제 이러한 들밥은 사라져버렸다. 요즈음은 농촌에서도 일손 구하기가 쉽지 않은데다 하루 일당 노임이 전국적으로 또박또박 정해져 있으며 서로 나누는 인심 따위는 없어졌다.

들밥의 아련한 추억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어려서 시골에 가곤 했는데 도시에서 살아서인지 모와 피도 구분을 잘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손 돕겠다고 바지를 걷어붙이고 논에 들었다가 살짝 드러눕고는 저수지로 냅다 도망하여 물놀이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삼촌 고모들과 할머니 할아버지는 뻔한 개구쟁이의 심술을 알고도 함박웃음과 함께 “그래 저수지 물은 시원하더냐?” 물어주시곤 했습니다. 한참을 놀다 보면 큰엄마, 작은엄마들이 머리에 이고 나온 들밥에 제일 먼저 달려들었습니다. 큰 양푼에 빨간 고추장과 참기름에 비벼 먹던 식은 밥 두 덩이 때문에 제가 이렇게 키가 커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들밥은 정말 맛있고 고소했습니다.

“섬김을 받고, 은혜를 받고, 받고 또 받고…….

받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주는 것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한참 젊은 시절, 배낭을 메고 이 산 저 산을 누비며 산적두목이라 불렸던 때도 있었습니다. 산 아래에 내려서면 논밭에서 일하는 분들이 꼭 있었습니다. 새참을 잡수시고 있는 어르신들 옆을 지나다가 “어머니, 저희도 한 술 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종종 물었습니다. “별거 없는디 자셔 볼라요?”하시며 내주시던 들밥을 참 맛있게도 먹었습니다. 시골에 다니며 먹었던 들밥의 추억이 있어서 그리고 넉넉한 농촌 사랑을 받아본 바가 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젠 이런 들밥은 사라졌습니다. 지금은 모두 반듯반듯해진 논두렁 밭두렁 같이 바르게만 요구해야 하고 정당하게만 요구해야 하는 시대가 되고 보니 함부로 달라고도 못 하지만 먹고 가라고도 못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옛날, 교회에서 뭐만 했다고 하면 동네잔치였습니다. 성탄절 발표는 마을의 잔치였고 학교 운동회 다음으로 재미있고 맛난 축제였습니다. 추수감사절이면 먹을 것을 이웃들에게 돌리고 설날 추석에도 양말 한 짝, 콩기름 한 병이라도 선물로 돌리곤 했습니다. 이런 나눔으로 인해 훗날 믿음의 열매로 만들어진 수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들밥 없어지듯 교회도 이런 나눔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사랑방 같은 카페를 만들어 놓고 무료 커피도 드리고 책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며 편히 계시다 가시라고 해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차라리 돈 주고 사 먹는 테이크아웃 커피점을 차려 놓으면 정당하게 값 치르고 먹을지언정 공짜는 부담스러워서 싫다고 손사래를 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당연히 교회에서 아무리 좋은 행사를 만들어도, 집회가 아닌 열린 음악회나 명사 초청 강연을 해도 와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해봅시다. 우리가 섬김을 받고, 은혜를 받고, 받고 또 받고, 또 또 받고……. 받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서 세상을 향해 제대로 주고, 그냥 주고, 계속 주는 그 마음을 잃어버렸기 때문은 아닐까요? 주고 또 주고 또 주다 보니 동질성이 만들어져 교인은 같은 동네 사람이 되고, 교회는 동네 교회가 되어가는 그런 모습이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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