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영(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저자)

물을 좋아하지 않는데 많이 마시라고 한다. 몸에 수분이 없으면 건강에 좋지 않다고, 가장 싼 값의 보약이라고 한 사람도 있다. 나이가 나이라선지 귀가 순해져서 사람들 말을 잘 듣고 싶다. 그래서 집에 있던 보이차를 물 대신 마시기 시작했다. 우리 집에 와서도 몇 년씩은 족히 넘었을 보이차, 보이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 숙성되어 간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의심이 들긴 하지만 상하지는 않겠구나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도를 하는 사람들은 혀를 차겠으나 다기는 무슨, 그냥 집에 있는 우려먹기 쉬운 자그마한 찻주전자에 보이차 조금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세차한다. 먼지도 씻어 내지만 오랜 시간 웅크리고 있던 찻잎에 몸을 여는 시간을 주는 것이다. 뜨거운 물을 부어 잠시 기다린다. 커피를 마시는 본차이나 머그잔에 차를 따라 내고 다시 뜨거운 물을 붓는다. 어두움 속에 갇혀 있던 차의 노여움 같은 약간의 쓴맛, 그래서 첫 잔을 다 마시지 않는다.

그 첫 잔에다 두 번째 차를 따른다. 아주 미미한 나뭇잎 냄새와 순하디순한 맛, 목 넘김이 부드럽기 그지없다. 박완서 선생이 갑자기 아들을 잃고 수 날 동안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다가 차 한 모금이 넘어갔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물로는 할 수 없던 나뭇잎의 위로를 생각했던가,    혼자 마시는 차를 離俗이라고 한다. 차 한 잔으로 속세를 떠난다니 이해할 수 없는 경지다. 둘이 마시는 차는 아취 그득한 한적閑適, 셋이 마시는 차는 유쾌愉快이고 대여섯 명이 마시면 그 차는 저속低俗이 된다고 한다. 예닐곱이 모여 앉아 차 마시는 것은 베푼다고 해서 施 = 博愛라고 한다니. 저속이나 박애가 우리가 아는 단어와는 살짝 결이 다른 듯하나, 그런 구분 앞에서 생각되는 것이 많다.

 보이차는 그 강렬한 검붉은 색 때문에 맛이 진할 것이라는 편견이 있으나, 실제로 잘 발효된 보이차에서는 거의 아무 맛도 느끼기 어려우며 미묘한 감칠맛 정도만 있는 것이 특징, 향도 거의 없어 젖은 지푸라기나 말린 대추와 같은 향이 조금 나는 정도라고 하는데 이는 후발효 과정의 여파라고 한다. 그런데 이 맛 없는 맛이 보이차의 묘미라니, 
 차를 생각해보면 식물의 잎에서 시작해서, 아니 차나무가 되기 전까지의 과정은 또 얼마나 진진한가, 차가 되고 다시 물과 함께 다기의 과정 끓이는 사람의 정성과 손맛.....오죽하면 차에 도를 사용했을까.  결국 <아취>에 대한 이야기. 아는 자나 아는 이야기, 느끼는 자나 느끼는 이야기,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눈을 가졌다면 절대로 바라볼 수 없는 풍미의 서사.

 봄이다. 이즈음 꽃들은 말 없는 현자다. 얼마나 지혜로운지 세상에, 양지바른 땅에 등을 꼭 대고 피어나 있다. 등 시리지 않게, 차가운 바람이 등허리에 불어 닥치지 못하게, 냉이꽃도 아주 키가 작다. 무르익은 봄날 피어난 키다리 냉이꽃과는 현저하게 차이가 난다. 광대나물은 꽃잎 한술 내밀고 있다. 청보랏빛의 봄까치꽃은 우아하면서도 당당하다. 작은 키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난 봄꽃이다. 난 봄이야. 어찌 그들 앞에 무릎 꿇고 바라보지 않을쏜가. 맛없는 차를 <薄茶>라고 한다. 박다는 남에게 대접하는 자신이 만든 차를 겸손히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내가 마시는 차는 박다 임에 틀림없다. 나만을 위한 박다이며 그리하여 홀로이라 이속이며.....봄까치꽃 곁에서 박다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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