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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메니우스 심층분석 (25)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신앙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0.03.04 17:38
  • 호수 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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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웅 교수 (한국코메니우스 연구소 소장본지 논설위원)

5.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가 유럽의 경건주의운동에 미친 영향
  앞에서 소개한 대로 17세기, 유럽 사회는 근세 시대로 발전하는 새로운 시대의 전환기였다. 인간의 이성적인 가치를 앞세운 계몽주의가 싹트는 시기였고, 자연과학의 발전과 함께, 합리주의적인 사고가 전통적인 기독교의 권위에 새로운 도전으로 등장한 시기였다. 30년 종교전쟁(1618-1648)은 기독교의 전통과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역시 종교개혁을 부르짖고 일어난 프로테스탄트 역시 루터파와 칼빈파로 분열되어 신앙 교리의 대립과 다툼은 신앙의 통일성을 상실한 채, 유럽 사회와 프로테스탄트를 더욱 혼란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신앙과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경건 운동은 프로테스탄트 내에서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을 교회역사는 경건주의(Pietismus), 또는 경건운동(Froemmigkeitsbeweg- ung)으로 정의(定義)한다. 독일의 교회역사가 알란트(K.Aland)는 ‘경건주의’라는 사상체계는 결코 제시된 일이 없으며, 다만 항상 각인된 여러 신앙의 형태들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경건주의를 해명하였다. 대체로 경건주의운동의 패러다임은 3단계 과정의 신앙형태를 가지는데, ‘죄 고백’과 ‘중생의 체험’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예수 제자의 삶’에 있었다. 그리고 경건주의운동은 역시 개인의 회심과 함께 중생한 자들에 의한 교회를 새롭게 하려는 교회개혁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리고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는 이러한 유럽의 경건주의운동이 생성되는 과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이러한 정황은 최근의 역사연구를 통해서 확인된 내용들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새로운 경건 운동에 깊이 관계된 사실들을 코메니우스와 형제연합교회의 여러 역사적인 정황들에서 쉽게 확인할 수가 있게 된다.    

  1) 유럽 경건주의운동의 주역으로서 코메니우스의 활동과 영향
  코메니우스가 유럽의 경건주의운동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먼저, 영국에서 일어난 청교도들(Puriten)과의 접촉에서였다. 그는 1641년 9월, 영국의회의 초청을 받고 런던에 가게 되는데, 그곳에서 약 9개월 체류 동안에 영국의 퓨리턴들과 교제하게 된다. 그리고 퓨리턴들이 새롭게 추구하는 영국의 교회개혁과 퓨리턴의 경건운동에 코메니우스는 적극적인 지지와 독려 자로서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코메니우스를 런던으로 초청한 배후인물이 코메니우스의 친구였던 사무엘 하르트립(S.Hartlib)이었는데, 그는 이미 영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청교도들(Puriten)과 깊은 관계에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1637년 코메니우스가 작성하여 보냈던 “범지혜의 선구자”(Prodromus Pansophiae)란 책에 매료되어 코메니우스의 동의도 받지 않은 채, 1638년 런던에서 그 원고를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는데, 그 목적은 유럽의 지성인들과 정치인들에게 코메니우스의 범(모든)지혜(Pansophia)의 교육철학적인 사상을 알리고 싶어서였고, 이제는 그를 데려다가 퓨리턴들이 희망했던 영국의 교회개혁과 국가교육개혁의 작업을 그에게 맡겨서, 영국의 실제적인 종교개혁이 관철되기를 염원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원래 영국에서 새롭게 일어나고 있는 퓨리턴(청교도)의 생각이었으며, 그들의 동의하에서 코메니우스의 초청을 계획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영국은 의회파와 왕당파 사이에 내전이 발생하였고, 그 전란으로 인하여 코메니우스는 아무런 작업도 추진하지 못하고, 런던에 머물다가 다시 되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코메니우스는 영국의 퓨리턴의 지도자, 레위스 베일리(Lewis Baylys)가 쓴 고전적인 “경건의 실제”(Praxis Pietatis)라는 책을 체코어로 번역하여 보헤미아 형제연합교회에 알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형제연합교회 형제들의 경건한 삶의 변화에 영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코메니우스가 영국의 퓨리턴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할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독일에서 일어나는 경건주의운동과도 깊이 연관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은 독일의 신비주의 신학자인 야콥 뵈메(Jakob Boehme, 1575-1624)와의 관계에서였다. 특히 코메니우스는 뵈메가 제시했던 “그리스도와 회개와 제자로서의 삶을 인도하는 방법”, 그리고 천년왕국에 관한 영향을 받기도 했었다. 그러나 후에 뵈메의 경건에 관한 생각과는 궁극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었는데, 그것은 뵈메가 ‘신지혜’(Theosophia)를 강조하는 반면, 코메니우스는 ‘범지혜’(Panso- phia)를 내세웠고, 뵈메의 거대한 세계의 신비에 관한 해석보다는 성경에 충실한 새롭고 실천적인 학문체계와 그 학문의 극복을 병행시키는 일들에서 뵈메의 생각과는 현저한 차이를 가졌으며, 마침내 그는 뵈메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었던 것이었다.

  코메니우스는 역시 화란으로 망명해 갔을 때, 네델란드의 미델부르그에서 시작된 네델란드 초기의 경건주의 운동가인 라바디(Jean de Labadie,160-1674)를 알게 되었고, 그와의 교제를 통하여 화란의 경건주의 운동에 또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것은 코메니우스가 라바디의 경건운동을 지지하며, 배후에서 멘토의 역할을 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의 역사연구에서 밝혀졌다. 그리고 이전에 라바디는 루터파교회의 경건주의 운동가인 스페너(Spener)를 만났으며, 독일 경건주의 운동에도 라바디(Labadie)는 영향을 미친 것으로도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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