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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학교 대학원 신학박사(Ph.D.)논문 연재(9)
  • 전경숙 박사(성공회대 Ph.D.)
  • 승인 2019.11.20 15:52
  • 호수 464
  • 댓글 0
전경숙 박사, 성공회대(Ph.D.) 한신대(M.Div.) 부산대 수학과

   뒤러와 루터

  경건운동과 인문주의운동을 함께한 루터는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을 펼치게 되는데, 이것은 “교회중심주의(churchliness)”인 로마교회와 대조되었다. 루터는 자신의 저작집 머리말에서, 복음을 강조하고 교회를 재정의했으며, “신의 의로우심(the righteousness of God)”, 자신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삶을 다시 주의 깊게 보게 했던 사건들, 그리고 로마교회가 자신을 파문하는 등 개혁가들을 추방하고 유럽에 전쟁을 야기한 것에 대하여 기술했다. 루터의 등장은 독일 민족의 공동소속감을 고취시켰고, 루터는 독일의 “헤라클레스”이자 “나이팅게일”로 칭송되었다. 루터는 1522년에 에라스무스의 그리스어와 자신이 직접 만든 관용어로 번역한 첫 독일어 신약성서인 ‘9월성서(September Testament)’를 출판했고, 1523년에는 멜란히톤 등 히브리어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독일어 구약성서를 출판했다. 루터의 독일어성서는 인쇄술의 발전에 힘입어 곧 독일 민족의 필독서가 되고, 그들의 종교적 삶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뒤러는 루터를 만난 적은 없었지만, 루터의 독일어 저작들을 모두 구입하여 숙독했다. 종교개혁은 뒤러에게는 단순히 지적이고 윤리적인 갱신만이 아니라, 억압된 의식에 자유를 가져다 준 구원운동이었다. 뒤러가 네덜란드 여행 중 루터의 습격 소식을 듣고 ‘루터 비탄(Lutherklage)’이라 불린 일기에 “...만약 루터가 핍박 받았다면 우리는 다시 우리의 피와 땀의 열매를 도적맞고 발가벗겨지게 될지도 모른다....오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여, 하나님에 열광되어 있는 이 남자(루터)를 비탄하도록 나를 깊이 도우소서...”라고 적었는데, 이는 루터에 대한 뒤러의 존경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해준다. 네덜란드 여행에서 돌아온 후, 뒤러는 루터의 사상을 담은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위 작품들은 “최후의 만찬(Last Supper)”을 주제로 한 1510년과 1523년의 목판화이다. 1510년의 목판화는 전통적인 성만찬 주제 장면(요 13:21)으로 예수의 양쪽으로 12제자들이 있으며 화면 오른편에 허리춤에 돈주머니를 찬 유다가 보인다. 식탁 위에는 ‘희생’을 상징하는 양이 담겨 있는 큰 접시를 중심으로 빵과 개인용 접시들, 포도주잔이 놓여있고, 한 제자는 일어선 채 손에 든 잔에 포도주를 따르고 있다. 1523년의 목판화는 유다가 자리를 뜬 이후의 상황(요 13:30)으로, 뒤러는 루터의 주장을 따라 예수가 11명의 제자들과 인간을 죄에서 구해주는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약속을 선포하는 장면으로 성만찬을 표현하였는데(요 13: 34-35), 1510년 작과 달리 식탁 위에는 예수님 오른편에 성배만 놓여있다. 한편 바닥에는 빵이 가득 든 바구니와 커다란 빈 접시, 그리고 포도주주전자가 놓여있지만, 아직 포도주잔은 놓여있지 않다. 루터는 이 목판화가 제작된 1523년에 “평신도도 빵과 포도주로 성찬식을 해야 한다”고 선언했으나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찬식에서 평신도에게는 빵만을 허락하고 포도주는 성직자만이 마시도록 정하고 있었다. 뒤러는 이러한 포도주잔의 배치를 통하여 루터의 ‘성배논쟁’(Kelchstreit)에 대한 관객의 생각과 판단을 물어보고 있다.

전경숙 박사(성공회대 Ph.D.)  dsglory3604@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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