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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얻는 진리화원소요(畵苑逍遙) -화가의 시각으로 세상과 믿음을 말한다-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09.04.10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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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소요(畵苑逍遙) -화가의 시각으로 세상과 믿음을 말한다-


 한강 둔치에 가본 경험이 있는 분은 한여름에도 연을 띄워놓고 휴식을 즐기고 있는 시민들을 가끔 보게 된다.

 부드러운 녹색의 풀밭과 흐르는 강물, 흰 구름 떠있는 하늘에 한가로운 오색의 연(鳶)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해진다. 가오리를 비롯한 조류, 동물등의 다양한 형태와 일본식 방패연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정지 위성처럼 공중에 떠 있기만 해서 한국전통 방패연같은 역동성은 전혀 없다.

 연은 바람에 의한 양력으로만 떠오른다. 그래서 바람이 약하면 띄울 수가 없는 게 약점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통방패연은 웬만큼 약한 바람에도 잘 뜨는데 그 이유는 연의 중앙을 오려낸 구멍에 그 비밀스런 작동원리가 있다고 한다.

 산이 많고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의 지형과 풍세등을 고려한 발명품인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임진왜란때 우리의 수군들이 기호화된 이미지를 방패연에 그려서 통신수단으로 사용한 사례가 있는걸 보면 우리 전통연의 독특한 구조와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하게 된다.

 그러나 겨울 차가운 하늘 높이서 구멍 뚫린 가슴으로 바람을 토(吐)해 내며 끊어질듯 팽팽한 가는 연줄에 온몸을 매달고 있는 방패연의 절망과 떨리는 아픔을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는 차라리 가슴을 틀어막고 그 자리에 가만히 떠 있기만 해도 되는 것을 오히려 육신을 버리고 하늘과 바람을 취하였으니, 이것은 그의 겸손과 신적합일(神的合一)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아니겠는가

 사혁(謝赫)이 주창한‘화론 6법’에는 다섯 번째로 경영위치(經營位置)를 제시하고 있는데 경영위치란 그림을 그릴 때 제재(題材)의 취(取)함과 버림과 조직이 그리고 화면의 구상과 배치가 알맞게 되어있는지를 평가 기준으로 한다는 의미이다.

 왕백민은 그의 저서 중국화의 구도에서 취함과(取) 버림(舍)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한 황빈홍(1864-1995, 중국현대화가·평론가·시인)의 글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였다.

“풍경을 마주 대하고 그림을 그릴 때는 버린다(舍)는 글자를 깨달아야하고 사물의 모습을 기억하여 그릴 때는 취한다(取)는 글자를 깨달아 알아야한다. 버리는 것과 취하는 것이 사람에 의한 것은 아니지만 버리는 것과 취하는 것은 사람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

 화가는 오로지 자신의 주관만으로 실체적 진실에 근거하여 대상을 선택하고 불필요한 것들은 과감하게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중국 화가들 사이에 구전(口傳)되는 취함과(取), 버림(舍)에 대한 비결(?訣)이 있다고 한다.

“有一不二, 要五不可四”하나가 있어도 될 때는 둘이 있을 필요가 없고, 다섯이 있어야 될 때는 넷이 있어서는 아니된다.

 취함과 버림의 엄격함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는 비결이라 할 수 있다. 동서고금의 화가들이 취(取)사(舍)선택의 무한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과의 싸움을 반복해 왔다. 잘 그리고 싶은 욕구로 더 그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고,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 때문에 화면에서 붓을 거두는 최적의 시점을 놓치는 경우가 많이 있다. 그래서 모자라거나 번잡스런 그림이 되고 만다.

 기독교인들 또한 신앙일상에서 순간마다 취사선택의 결단으로 고민스러워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9)”

 온전히 자기를 버림으로만 가능한 순종, 날마다 자신의 죄를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을 때에만 주를 따를 수 있음을 말씀하신다.

 아직도 육에 속한 정과 욕심을 포기하
거나 내버리지도 않은 채 이것도 그리고 싶고 저것도 버리기 싫은 우유부단한 실존으로부터 내 자신 거듭나기를 원한다.

 바울사도는“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게 함이니(빌.3:8~9)”“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갈.2:20)”라고 당당하게 선언하지 않는가? 죄에 대한 완전한 분리 완전한 자유의 회복을, 그러므로 버리고(舍) 얻는(取) 역설적인 믿음의 위대한 진리를 웅변하고 있다.

이 환 영 동양화가
한국기독교미술인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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