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2년이 지난 시점에서 마치 영화나 드라마와 같은 상황은 진행형입니다. 유혈사태, 비극적인 사건의 연속입니다.

2014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로부터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처음으로 돈바스 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러시아 내의 탄압은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부터 있었지만, 전쟁을 시작으로 블라디미르 푸틴은 더욱 자신만만해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멈추어야 하고 더 이상의 피해 없이 평화로운 지구가 되는 것이 모든 인류의 바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전쟁은 어떻게 끝날 것인가?” 수많은 정치인과 전문가들도 이 질문에 어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러시아 하면 생각나는 것이 가꾸어지지 않은 자연입니다. 가로수도, 해변도, 오래된 건물들로 이루어진 도시였습니다. 제가 거주하던 곳이 광산이 있던 ‘아르쫌 공항’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1996년 2월 태어난 지 6개월밖에 안 된 아들을 품에 안고 남편을 따라 러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습니다.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며 비행하는 동안, 두 시간여의 시간이 참으로 길게 느껴졌습니다.

지난한 비행이 끝나 아르쫌 공항에 도착했을 때 공항의 분위기는 거의 살벌했습니다. 마치 가보지 못한 그곳, 상상하던 북한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싶었지요.

줄이 길게 늘어서서 짐을 확인하는 과정에 때마침 품에 안고 있던 아기가 울음을 터뜨리자 승무원들이 우선순위로 통과시켜주었습니다. 자식 덕을 미리 본 셈이지요.

그 당시만 해도 세관 짐 확인을 철저히 하던 때라, 횡재라 생각했습니다. 짐을 조사하다가 그들 맘에 드는 물건이 있으면 무조건 압수라는 명목으로 강탈해 가는 경우가 많았을 때 거든요.

도착하자마자 우리가 기거할 아파트 리모델링 공사 때문에 남편은 아침 일찍 나가고, 난 6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 아파트에 갇힌 듯 온종일 남편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렇게 지루하게 시작한 러시아의 시간이 영화처럼 스쳐 갑니다.

추운 겨울에 눈이 내리면 푹푹 빠지는 통에 유모차를 탈 수 없어서, ‘쌍키’라 불리는 썰매에 우리 큰별이를 태우고 켜켜이 쌓인 눈길을 다녔습니다.

봄이 되면 화석처럼 쌓였던 눈길이 녹아 진흙탕 길이 되곤 했지요.

밤이면 가로등이 없으니, 칠흑같이 어두운 길을 가다 맨홀 뚜껑을 훔쳐 간 ‘가난한 사람들’ 덕분에 아기를 안은 채 맨홀로 빠져버린 아빠가 부상을 입으면서도 자기 몸을 방패 삼아 품에 안은 아기를 안전하게 보호해 낸 일도 있었습니다.

누군가 공중화장실의 좌변기 위 판을 떼어가는 바람에 엉거주춤 볼일 봐야 하는 웃지 못할 추억도 기억이 납니다.

돈이 되는 건 모조리 훔쳐 가는 ‘가난한 사람들’

그럼에도불구하고, 영하 20°가 넘어가는 추위에도 온 가족이 먹을 식량, ‘보로딘스키빵’값을 구하려고 본인 집에서 가장 귀한 것들 크리스탈 유리컵부터 양말까지 들고나와 서서 그 물건들이 팔릴 때 까지 온종일 추위를 견디던 그 ‘가난한 사람들’

러시아 땅에서 수많은 ‘바르바라와 마까르 제부쉬낀’(가난한 사람들 소설의 주인공)를 보며, 그 동토의 땅에 살며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던 때가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그 품에 안긴 아기가 지금 30세이니, 참 오래전 일입니다.

오늘 추억에 잠기게 한 러시아 땅, 그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처녀작인 소설

‘가난한 사람들’ 1844년 11월에 초고를 완성한 도스토옙스키는 그다음 해 5월까지 수정 작업을 거쳐 탈고한 원고를 ‘D.그리고로치’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는 ‘뻬쩨르부르그 선집’을 준비 중이었던 ‘N.네끄라소프’와 함께 밤새워 읽고 감동합니다. 비평가 ‘V.벨린스끼’에게 ‘새로운 ’고골‘이 나타났다’라는 기별과 함께 그 원고를 보여 주었지요. 벨린스끼도 청년 작가, 도스토옙스끼에게 찬사를 보내며, 곧 문단의 여러 인사들에게 소개합니다. 덕분에 젊은 도스토옙스키 스스로 천재라는 자부심과 허영심으로 문단에 데뷔합니다.

작품은 4월 8일부터 9월30일까지 가난한 연인이었던 ‘마까르와 바르바라’가 주고받은 서간체 소설입니다. 서정적인 봄과 함께 시작된 사랑은 가을과 함께 끝이 납니다.

너무나 가난했던 중년의 하급 관리인 ‘마까르 제부쉬낀’, 결혼은 꿈조차 꿀 수 없었고, 아름답고 소중한 여인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자신의 사소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난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고 절망하며 현실적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정신적으로라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것으로 읽힙니다.

그는 자신의 처지에 대하여 사색하고 걱정하고 배려하고 번민할 줄 아는 인물입니다.

그러나 타인에 대하여 지나치게 신경을 쓰기 때문에 그의 말은 이중적입니다.

그는 비록 정서(正書)나 하는 서기이지만 문학작품을 읽고 평을 하거나 스스로 작가가 되는 상상을 할 만큼의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모습을 객관화하고 인간다운 인간, 사고나 감정, 자기 성찰 등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빈곤으로 고통받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한층 고차원적인 동정심을 끌어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까르 제부쉬낀’의 빈곤은 심리적 차원에서 머무르지 않고 문학적 차원으로 올라갑니다.

고아였던 젊은 여자 ‘바르바라’를 만나면서 그의 문학적 빈곤과 바르바라의 문학적 풍요는 음산한 대조를 이루니 두 사람의 관계가 평탄치 않아 보입니다.

‘바르바라’는 궁핍한 삶 속에서 노총각인 ‘마까르 제부쉬낀’에게 정신적 위안 받고 사랑했지만 서로의 가난이 자신들을 고통으로 몰아갈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르바라의 집으로 찾아온 낯선 남자의 청혼에, 자신을 구원해줄 유일한 희망의 빛이기를 바라서 청혼을 운명처럼 받아들입니다.

돈밖에 모르고, 무례하며, 매력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나이 많은 남자를 따라 ‘바르바라’는 마음에도 없는 결혼을 하기 위하여 ‘마까르 제부쉬낀 ’의 곁을 떠나는 비극적 연애 소설입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가난은 고귀하고 소중한 사랑의 감정조차도 지킬 수 없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을 이리도 처절하게 묘사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의 고달픈 운명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게 묘사됩니다.

‘바르바라’의 어린 시절 회상 속에 등장하는 첫사랑 ‘뽀끄로프스키’의 지적인 모습을 바라보며, 책이야말로 의사소통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합니다.

첫사랑 때문에 싹튼 책에 대한 애착 때문에 그녀는 풍요로운 독서 체험을 향유 할 수 있었습니다. 뽀끄로프스끼의 방 책장에는 책이 빽빽하게 꽂혀있었습니다.

‘바르바라’는 그의 책들을 보며,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합니다. 아마도 그가 아는 것을 다 알아야 그와 우정을 나눌 자격이 생기는 거로 생각했었나 봅니다.

‘바르바라’의 첫사랑인 그는 건강 때문에 학교를 계속 다닐 수가 없었습니다. 바르바라와 이웃들은 그를 대학생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가난했지만 게으르지 않았고, 성실한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병에 걸려 투병 중, 죽음을 맞이하기 한 시간 전 병상에서 바라보던 창문 밖 풍경은, 그가 그리도 보고 싶어 했던 햇살조차도 그에게는 사치라는 듯, 음울한 새벽 아침에 비를 쏟아붓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그녀 첫사랑의 관을 실어 가는 마차를 바라보며 울부짖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로웠습니다.

이처럼 지적이고 문학적인 뽀끄로프스끼를 사랑한 적이 있는 ‘바르바라’에게 ‘마까르 제부쉬낀’은 어느 정도 이상은 접근할 수 없는, 문학적 빈곤의 상징입니다.

‘마까르 제부쉬낀’과‘바르바라’ 사이에 좁혀질 수 없는 거리는 독서뿐 아니라 글쓰기에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마까르 제부쉬낀’의 편지는 독백 조의 장광설이지만 ‘바르바라’의 편지는 절제와 간결함을 보여 줍니다. ‘바르바라’가 제부쉬낀을 배우자로 선택하지 않은 것은 나이, 경제적 빈곤 못지않게 문학적 빈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도스또옙스키는 물질적 빈곤을 주제로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가난한 사람들’을 통해 문학에 관한 문제를 제시하고 미학과 존재론의 상관성을 보여 줍니다.

한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읽는 책, 그가 쓰는 글이라는 것을 도스또옙스끼는 작품을 통해 말하고 있습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19세기 러시아의 빈곤을 상상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더구나 요즈음 MZ세대는 책보다 핸드폰이 더 친근합니다. 그들의 문학적 감수성의 빈곤은 거의 살벌한 지경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문학적 빈곤에 머무르지 않도록 어릴 적부터 책을 좋아하는 환경을 열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절합니다.

작가 김현희 (프리랜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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