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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이재정 목사의 하고 싶은 말(20)무릎담요 예찬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10.26 07:33
  • 호수 5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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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정 목사(기성 복된교회)

10월의 ‘기상캐스터’들은 연일 심한 일교차를 경고합니다. 밤과 낮의 기온 차가 15도 이상 벌어지는 상황이니 제법 준비가 필요합니다. 새벽에 출발하는 일정에 맞춰 넥타이 맨 정장 차림으로 나서면 한낮에는 여지없이 궁상맞습니다. 새벽 산책길에 주머니에 손 넣지 않으려면 장갑을 껴야 합니다. 코로나가 아니더라도 마스크를 쓰면 찬바람에 코가 맵지 않습니다. 새벽 예배 시간에도 강단에 서서 예배를 인도할 때는 겉옷 없이 와이셔츠 바람이면 됩니다. 그런데 엎드려 기도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어깨가 서늘합니다. 아직 난방으로 냉기를 쫓기는 이른 계절이어서 기도실에 무릎담요 한 장을 두고 지내지요. 캐시미어같이 값비싼 재질은 아닙니다. 폴리에스터 재질이지만 잘 가공한 덕분에 포근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싼값에 나도는 담요입니다. 이걸 어깨에 턱 걸치고 가슴으로 여며 쥐면 그 온기와 아늑함이 안정감을 줍니다.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 촉감으로는 팍팍한 기도 시간이 온화해집니다. 장기간 금식 기도로 들어앉았던 적이 있습니다. 바짝 야윈 사지가 배겨 이불을 두껍게 깔고 덮어도 불편함은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기어이 정한 날짜를 견뎌 낼 때, 메마른 광야에서 그 긴 시간을 이렇다 할 보조 수단 없이 견디셨을 주님의 고통이 뼈저리게 와닿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기억 속의 이불이거나, 이 새벽의 무릎담요 한 장이 시린 어깨 덮어 주는 어버이 손길 같다가 마침내 하나님 손길로 와 닿습니다. 포근한 담요 한 장이 서늘한 새벽의 기도 응답인 셈입니다.

‘렘브란트’가 그린 “탕자의 귀향”이라는 그림이 게시하는 영성을 따습게 느낍니다. 누가복음에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의 한 장면, 아버지 돈 미리 당겨서 집 나갔다가 한바탕 소용돌이치는 시간을 건너 터덜터덜 실패의 발걸음으로 집에 돌아오는 둘째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을 맞아 품에 안는 아버지의 표정이 압권입니다. 거의 눈이 먼 듯, 아무 수식 없이 늙어버린 표정으로 ‘그눔’을 얼싸안거든요. 그릇된 아들을 향한 선악 간 심판을 유보하는 눈 감음으로 읽힙니다. 더불어 놓치지 말아야 할 장면이 그 아들을 감싸 안는 아버지의 손길입니다. 왼 등짝에 얹은 오른손은 여리고 가냘파 보입니다. 그렇게 그려 놓은 화가의 속내는 물을 수 없으니 알 길이 없습니다. 그가 남긴 그림 속의 여린 손은 세인들에 의해 ‘어머니 손’으로 해석됩니다. 그리 보면 꼭 그런 감성이지요. 오른 어깨에 두른 왼손은 듬직하고 두툼한 남성, 혹은 아버지 형국입니다. 그 품 안에 든 둘째는 무릎담요 덮어쓴 만큼이나 안온해 보입니다. 아버지 손 닿은 자리가 꼭 내 시린 어깨 자리거든요. 돌아온 아들의 왜곡된 행실을 외면하느라 감은 눈과 자기혐오로 바짝 오그라든 아들의 어깨에 얹은 두 손은 모두가 공감하는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담요는 단순히 한기를 막아주는 것에 덧대 뭐든 덮는 덕목도 있습니다. 그 안에 든 게 무엇이든 가려주고 싸매 주는 일입니다. 그게 제법 높은 복음적 가치라는 걸 배웁니다. 간음하던 지난밤의 행실이 까발려져 군중 앞에 붙들려 온 여인의 처참한 몰골이 주님 앞에 서니 기막히게 가려집니다. 그 처방이 무릎담요 같습니다.

집 나갔던 둘째가 험하게 살다 온 한 토막 시간의 내면을 검사가 죄인 취조하듯 까발려 버리면 온 가족이 설 자리 잃습니다. 아버지는 자식을 향한 실망으로, 어머니는 애처로움으로, 형은 분노로, 마침내 당사자는 자기혐오로 극단적 선택의 길에 서게 될 겁니다. 까발리는 건 양파 벗기기처럼 없는 실속을 끊임없이 드러내 마침내 파멸에 이르는 길입니다. 반대로 덮어 두면 싹도 나고, 상처도 낫습니다.

작은 상처에 임시 처방으로 붙이는 ‘상처용 밴드’가 유용합니다. 상처를 감싸거든요. 하룻밤 지나면 통증도 가시고, 피도 멎고, 아물어 듭니다. 사람마다 왜 아프지 않겠어요. 상처도 부지기수지요. 잘 덮어 두면 성나지 않게 가라앉아 잦아들 아픔입니다. 이 시대의 예수쟁이들더러 그리 살아 내라고 둘째 아들 데려다 시범해 주신 거 아니겠어요?. 덮어 주지 못한 상처들은 긁혀서 더 아프고, 곪고, 덧나서 기형적으로 변질합니다. 덮어 주지 못한 마음의 상처들은 대부분 병적 신앙, 이단으로 곪아갑니다. 그리되기 전에 우리가 값싼 무릎담요 한 장 챙겨 외롭고 아프고 시린 그들의 어깨를 따습게 덮어 주었어야 했습니다. 그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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