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정 목사(기성 복된교회)

길고 폭력적인 장마철입니다. 수술 자리도 꾸덕꾸덕 아물어가는 월요일에도 여전히 비가 내립니다. 홍수 피해 소식을 듣지만 마음은 차분합니다. 주일 아침에 언뜻 들은 베토벤이 그리워서 2019년 8월 4일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European Union Youth Orchestra”(유럽연합 청년 오케스트라) 가 “Vasily Petrenko”(바실리 페트렌코)의 지휘로 연주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을 다시 듣습니다. 한 시간 넘는 연주를 반복해서 듣노라니 베토벤 같은 음악가가 다시 있을 수 없다는 평점에 인색할 수 없습니다.

마침 널찍하고 섬세한 컴퓨터 화면은 연주자들의 찡그린 미간이나 음악에 심취한 옅은 미소도 놓치지 않습니다. 새파랗게 젊은 연주자들이 젊어서 힘차기도 하지만 연주의 절정에 이른 사람들처럼 노련하게 베토벤의 9번을 만들어 냅니다.

열심히 공부한 덕에 오케스트라에 연주되는 악기들과 그 배치도를 제법 상세하게 외울 수 있습니다. 잘 보지 못하던 ‘콘트라 바순’까지 등장하는 규모입니다. 피콜로, 플루트, 클라리넷, 오보에 같은 목관 악기들 소리는 섬세합니다. 트럼펫, 트롬본, 호른, 튜바 같은 금관 악기는 묵직합니다. 바이올린, 비올라 같은 현악기는 여성적이고 첼로, 더블 베이스 같은 현악기는 남성적입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연주자들 중에는 한국인으로 보이는 이도 있어서 혼자 즐겁습니다. 만능 재주꾼 임재규 목사님이 설치해 준 진공관 앰프와 거기 연결된 묵직한 스피커가 ‘더블 베이스’ 같이 중후한 현악기 음까지 잘 드러내 줍니다. 절정에서 미친 듯이 두들겨 대는 팀파니 소리도 그대로 전달 됩니다. 섬세함과 웅장함이 파도처럼 교차 될 때마다 심장 박동이 달라집니다. 4악장을 연주에서는 아리따운 청년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거의 “헤드뱅잉”에 가까운 액션으로 악기를 휘저으니 소리가 폭발합니다. 타악기는 말할 것도 없구요. 관악기 연주자들 목은 모두 핏대가 섭니다. 연주는 공연장을 넘어 광장에, 우주에, 마침내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내 심장에도 빈틈없이 가득합니다. 그런 감동을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눈물이 돋는 모양입니다.

연주의 압권은 청중과 호흡입니다. 공연장 앞, “프리드리히 실러” 상이 서 있는 널찍한 광장에 그득히 관중들이 모였습니다. 연주 실황은 광장으로 생중계됩니다. 부모 손에 이끌린 아이, 연인 품에 기댄 여인, 광장을 안방 삼아 누운 청년, 음악으로 한평생을 살았을 법한 노인의 황홀한 눈빛 모두가 연주의 요소입니다. 그 젊은이들의 연주에 완전히 몰입된 모습입니다. 남녀노소 모두의 표정에 해방과 자유를 만끽한 행복으로 가득합니다.

4악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환희의 송가”(찬송가 64장, 605장)입니다.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를 가사로 작곡했답니다. 대충 “환희여, 아름다운 신들의 불꽃이여, 낙원의 딸이여, 우리 모두 정열에 취해 빛에 가득한 성소로 들어가자. 신성한 그대의 힘은 가혹한 현실이 갈라놓았던 자들을 다시 결합시키고 그대의 부드러운 날개가 머무르는 곳에. 서로 껴안아라! 만인이여 전 세계의 입맞춤을 받으라! 형제여, 별이 빛나는 하늘 저편에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계실 것이다” 정도의 가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류애를 회복하자는 내용인 이 노래를 1985년 유럽연합은 공식 국가로 채택했습니다. 장엄하고 활달한 멜로디입니다.

실내 공연의 마지막 곡을 연주하고 연주자들의 작별 인사까지 치른 다음 지휘자 ‘바실리 페트렌코’가 약간 익살스러운 몸짓으로 청중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같은 시간 광장의 군중들 앞에서 청바지 입은 지휘자가 계단 위에서 그들을 향해 두 팔을 들어 지휘를 도모합니다. 청중들은 익숙한 듯 같은 목소리로 “환희의 송가”를 합창합니다. 합창은 금세 열창으로 달아오릅니다. 감동의 도가니입니다. 우리 가수 “사이”가 만들어 내는 K-POP 공연장의 열기와는 사뭇 다른 열기입니다.

미열이 식지 않아서 저녁에 돌아온 집에서 그 연주를 다시 듣습니다. 같은 음원을 찾아 만만한 기대로 재생합니다. 그런데 웅장함은 간데없이 쩨쩨한 소리로 전락 됩니다. 문제는 스피커입니다. 본래 가진 음원이 아무리 완벽해도 재생하는 스피커가 쩨쩨하니 쩨쩨한 소리밖에 못 만듭니다. 완벽 음질 예수 음원이 나를 거쳐 재생될 텐데 나는 뭔 소리 내고 있는지 갑자기 ‘플레이 버튼’ 중지하고 멍해집니다. 섬세한 바이올린 소리도, 중후한 더블 베이스 울림도 다 놓치고 개심심한 멜로디만 흥얼거리는 스피커로 낡아 버리는 거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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