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정 목사(기성 복된교회)

지난 가을에 별 노동력이 없어 보이는 주민들을 모아 취로사업을 벌이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로 노인들을 집안에 방치하지 않고 약간의 용돈을 드리면서 활동하시도록 배려하는 사업입니다. 마을 주변의 둔덕에 철쭉을 심습니다. 바짝 마른 묘목들을 대충 땅에다 묻는 일입니다. 머리에 고운 수건을 두르고 화장까지 한 노동자들이 하얀 장갑을 끼고 모여서 별로 신중하지도 않고 숙달되지도 못한 솜씨로 묘목들을 땅에다 묻는 것입니다. 계절이 늦은 가을이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그 작업이 나무를 심는다기보다는 나무를 땅에 장사지내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 일에는 제법 일가견이 있는 터여서 그 대충 묻는 묘목 때문에 조바심이 나지만 어쩌지 못하였지요. 

그 위로 겨울 한 철이 혹독하게 지났습니다. 눈이 덮였다 녹기도 하였지요. 추위뿐 아니라 질서들을 무너뜨리는 시간도 톡톡히 지났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담배꽁초를 버려서 지저분해지는가 하면 바람에 흩날리던 쓰레기 나부랭이들이 걸려서 엉망입니다. 마침 학생들 등굣길의 신호등에 닿아있어 기다리는 발걸음들이 잠시 머무는 모퉁이다 보니 아이들이 만드는 쓰레기들이 자연스럽게 쌓이게 되는 곳입니다. 

그런 시간을 지나고 새봄이 되었을 때 과연 나무들이 살아나 줄까 하는 조바심이 또 듭니다. 이 열 평쯤 되는 철쭉밭은 내 조바심대로 언 땅이 녹고 벚꽃을 필두로 진달래 철쭉이 다 피었다 지도록 살았다는 징조를 내보이지 못합니다. 막 생명에 대한 기대를 거두고 이유 없이 짓누르는 무거운 책임감을 마음에서 내려놓을 만할 때야 비로소 생기를 돋우더니 겨우겨우 꽃을 내더니 하얀 꽃이 더러 섞인 분홍 철쭉꽃밭을 드디어 이루어 내더란 말입니다. 정말 다행스런 해후여서 후 한숨을 내 쉬고는 생명들을 축복해 주었습니다. 

며칠 사이로 여름 장마 같은 봄비로 뿌연 하늘을 씻어 유난히 맑은 아침 이 작은 철쭉밭은 드디어 개화 만발입니다. 철쭉은 꽃뿐 아니라 다섯 잎이 이어 돋아나는 귀물스러운 식물입니다. 그런 물건들을 빼꼭히 심어 놓은 둔덕이 참 탐스럽게 보입니다. 비 맞은 새잎들이 향기 좋은 비누로 세수한 우리 집 막둥이처럼 싱그럽습니다.

그렇게 이룬 작은 숲속에 언뜻 작년에 심은 몰골을 그대로 하고 앉은 녀석이 숨어 보입니다. 괘씸도 하고 궁금도 하여 헤집고 들여다보았습니다. 아뿔싸 녀석은 묘목밭에서 얻어 가진 주먹만 한 흙 한 덩어리를 뿌리에 달고는 그대로 공중에 떠 있는 것입니다. 심기를 잘 못 심었든지 지나가던 강아지가 헤집어 놓았든지 그것도 아니면 한 토막 시간을 지나면서 사연을 알 수 없는 무슨 일인가를 만나 그리되었겠지요. 이유는 알 길이 없고 다만 말라비틀어진 녀석의 몰골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뿌리가 땅에 닿지 않으니 따듯한 춘풍이 지나고 단비가 대지를 적셔도 받아먹지 못한 채 말라비틀어지고 만 것입니다. 왜냐면 놈의 출처가 거기인 까닭이지요. 흙에 뿌리를 두어야 살도록 지어진 철쭉이니 거기서 뿌리가 뜨는 사고는 그 책임이 뉘 게 있는지는 차치하고 생명 멸렬(滅裂)의 이유인 것입니다. 더 깊이 생각해 보자면 녀석의 죽음은 아마 지난겨울 동안에 이루어진 일이었을 겁니다. 그리 얼어붙은 허공에 뿌리를 드러내고 있었으니 무슨 수로 견디겠어요. 그건 추울 동안 아랫목 같은 땅속에 꽁꽁 숨겨 두어야 하는 것인데요. 

마음 둘 곳 없어 떠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땅속 같은 아랫목이 없어 추위를 못 견뎌 하지요. 철쭉처럼 자기 과오 없이 그리되는 수도 없지 않고 더 많은 경우는 뿌리 두기를 오히려 성가시고 버겁게 여겨 스스로 그리되는 수도 많이 있습니다. 뿌리를 두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지만 반면 성가신 것도 사실이거든요. 우리 동네 철쭉들처럼 내 취향에 맞지 않는 터전에 자리 잡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구요. 여하튼 생명은 그 뿌리가 땅에 닿아야 합니다. 사람은 부모님이 뿌리입니다. 거기 닿아야 공급이 있어 꽃을 피우는 겁니다. 부모가 인생의 뿌리라는 진리는 세상의 가르침에도 있습니다. 時曰 父兮生我요 母兮鞠我하시니 哀哀父母여 生我勞셨다 欲報深恩 昊天罔極 이로다. “시에 이르기를 아버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 나를 기르시니, 애닯다 부모님이시여. 나를 낳아 기르시느라고 애쓰고 수고하시었다. 그 은혜를 갚고자 한다면 넓은 하늘도 끝이 없네”.

성경은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말 4:6) 하십니다. 자녀들이 마음이 부모님을 떠나면 철쭉처럼 화를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정갈하게 가누어 뿌리 내리는 일에 우선하면 좋은 계절입니다. 찾아가고 손잡아주고 전화도 걸고 아직 젊거든 응석도 더 늦기 전에 부려 보고 그렇게 뿌리를 내려야 새 생명을 움 틔워 아름다운 꽃밭을 건사해 가는 겁니다. 지금은 꼭 그런 계절입니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