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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조선인을 목숨보다 사랑했던 선교사(눅9:22~23)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3.04.05 18:35
  • 호수 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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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곤 목사(한국교회 순교자 후손, 집단순교지 대표)

1885년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들의 첫 발걸음 이후 1985년까지, 100년 동안에 2950 여 명의 선교사들이 일억 만리 머나먼 땅에, 언어가 통하지 않고 문화시설이 없고 음식도 다르고 전염병도 많은데, 예수 그리스도의 진한 사랑을 체험하고 자원하여 찾아온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801년부터 1871년 병인박해까지 5천명~8천명 천주교인들이 학살되었다. 초기 선교사들은 이 역사를 알고도 살신성인의 자세로 조선을 찾아온 것이다. 본문에 십자가는 삶의 고난과 사역의 고통에만 머무르지 않고 죽음까지이다. 12제자가 그랬고 2천년 동안 순교자들의 죽음이 증거 한다. 조선 땅을 위해 목숨을 바쳐 헌신했던 선교사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존 로스 선교사는 스코틀랜드에서 중국의 산동과 심양에 1872년(30세)에 가서 사역했다. 1887년에 신약성경 27권을 번역하여 조선 선교의 기초석을 놓았다. 그는 15년 동안에 아내와 자녀 4명을 잃는 아픔이 있었지만, 선교현장을 떠나지 않고 사역했다.

제임스 게일 선교사는 1888년 캐나다에서 25세에 입국하여 연동교회에서 사역했다. 사역 중에 부인 해티가 결핵으로 둘째 아들 비비안이 소천하여 양화진에 묻었다. 게일은 한영대자전(韓英大字典)을 간행하였고 한국역사와 한국문학을 세계에 소개하는 공로를 세웠다.

로버트 하디 선교사는 캐나다 토론토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1890년 (25세)에 가족과 함께 내한하여 개성에 남도병원을 설립하고, 1903년 원산부흥운동의 불씨가 되었고, 이후 협성신학교 교장으로 봉사하였다. 그런 와중에 두 딸을 풍토병으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로제타 홀 의료선교사는 1890년 25세에 조선에 입국하여 1892년 윌리엄 홀과 결혼했다. 남편이 1894년 청일전쟁 때 부상병을 치료하다가 소천하고, 3년 후엔 딸도 풍토병으로 소천 했다.그는 아들 부부와 기홀병원, 구세요양원을 설립하고, 최초의 크리스마스 씰을 만들었다.

윌리엄 베어드 선교사는 1891년 평양에 숭실대학을 세웠다. 첫딸이 1894년 뇌척수막염으로, 1916년 아내 애니가 소천 했지만, 아들 윌리엄과 리처드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윌리엄 전킨 선교사는 1892년 27세에 입국하여 군산 구암교회, 예수병원, 영명학교, 멜본딘학교를 세우고. 전주서문교회에서 건축하고 전북지역에 여러교회를 세웠는데 세 아들이 소천하는 아픔이 있었다. 전주 기전학교는 43세에 소천한 전킨을 기념하는 학교이다.

길보른(Kilbourne) 선교사 가문은 1980년대까지 3대가 한국교회와 한국민을 위해 헌신했다. 1대 어네스트 길보른은 어느 날 환상 중에 미국에서 태평양을 가로질러 일본까지 연결된 고속도로를 보았다. 이 도로는 계속 연결되어 한국을 거쳐 중국에 닿았고, 그리고 천국에 연결 되어진 것을 보았다. 어네스트는 환상을 따라 동양에 들어와 270여 교회를 설립하였다. 그는 1907년 성결교단을 세울 때 밑 걸음이 되었고, 1912년 700석의 경성신학교를 건축할 때 모금을 하였다. 그는 한국성결교회 감독겸 성서학원장으로 활동하다가 1928년에 소천했다. 

그는 운명하기 몇 시간 전, 한 선교사에게 편지하기를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하며 담대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수십 년 동안 수백만 불의 돈을 출납하였으나, 나의 소유는 송곳 한 개 박을 땅이 없고, 집도 없고, 화려한 가구도 없고, 생활비로 쓰다가 남은 돈 80$ 밖에 없는 것이 나의 기쁨이요 자랑이다."라는 마지막 기록으로 그의 검소한 생활을 밝혔다.

2대 선교사 로슨 길보른은 성서학원 교수,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고문으로 활동하였으며 3대 선교사 에드윈, 엘마, 어네스트 길보른 3형제도 한국선교를 이어갔다. 특히 엘마는 한국전쟁 이후 섬과 빈민촌을 돌며 구제사역자로 활동하고 월드비전과 협력하여 고아원과 양로원과 나병환자 요양소를 세웠으며 세계구호위원회(World Relief Commission) 한국 책임자로서, 국민일보 발표에 의하면 매일 7만 6000명에게(천원씩 만 계산해도, 7천6백만 원) 16년간 밥을 제공한, 한국 빈민에게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엘마는 필자 부친의 친구로 여러 차례 집에서 뵈었는데 검소한 분이었다. 그의 유해는 진정한 고향인 양화진에 묻혀 있다.

린튼(Linton) 선교사 가문은 4대를 거쳐 헌신하고 있다.

1대 윌리엄 린튼(인돈) 선교사는 조지아 공대를 수석 졸업하고 한국 와서 48년간 교회를 세우고 의료, 교육 선교 활동을 했다. 그가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있을 때, 1919년 3월 5일 군산만세시위를 배후에서 지도했고, 한국의 3.1운동을 국제사회에 지지를 호소했다. 그는 전주 신흥학교, 기전여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지금의 한남대학교를 1956년에 설립하였다.

장인 유진벨(배유지)은 1895년 오웬 선교사와 함께 내한하여 사역했다. 그는 1898년 목포 양동교회를, 1901년에 송정중앙교회를, 1903년에 목포 정명학교와 영흥학교를 설립했다. 선교부를 1904년 광주로 옮겨 양림교회 시작하고 1905년 光州 최초의 종합병원인 제중병원(현재, 광주기독병원)을 세웠고, 1908년에 숭일학교와 수피아 여학교를 세웠다. 유진벨은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한센병자들을 몸에 끌어안았고, 치료뿐만 아니라 공동체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돌봐 줬다. 버려진 아이들은 양녀, 양자로 삼았고, 극빈자를 돌봐 주며, 학비가 있든 없든 교육 시켰고, 칠거지악이라는 이유로 쫓겨나 갈 곳 없는 여성들에게 집을 제공하고, 양잠기술, 바느질 기술 등을 가르쳐서 살아갈 수 있게 해 줬다.

3대 선교사 휴 린튼은 윌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로 군산에서 태어났다. 신사참배 반대로 1940년 온 가족이 강제 출국당했다가 미군 장교로 인천상륙작전에 참전했다. 그는 1954년 아내 로이스와 입국하여 전라남도를 중심으로 사역했다. 그는 1970년까지 간척 사업으로 얻은 20만 평을 땅 없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줬다. 그는 1984년 교회 건축용 자재를 싣고 오다가 교통사고로 소천했다. 당시 순천에는 앰뷸런스가 없었다. 부인 로이스는 대학에서 언론학을 전공하고, 컬럼비아 신학대학교에서 수학했는데, 지리산에서 빨치산들이 출몰하던 때에 들어와 결핵 퇴치 사역을 하여, 현재의 순천 기독 결핵 재활원을 만들었다.

4대 선교사 휴 린튼의 아들 스티븐 린튼은 1994년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고 북한을 50차례 이상 북한을 방문하여 의료지원 사역을 펼치고 있다. 그의 동생 존(인요한)은 한국에서 태어나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한국 토종’이다. 그는 부친의 교통사고를 통하여, 엠블런스 구급차 보급 운동을 통해 응급 환자 치료에 공로를 세웠다. 인요한 박사의 증언에 의하면(21.5.23) 린튼家에서 호남에 세운 교회가 612곳이라니 놀라운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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