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영(본지 논설위원, '속삭이는 그림들 ' 저자)

초저녁잠이 많아지면 나이든 사인이라고 여기라던데 깊은 밤이 되어도 잠 못 드는 것 보면 아직 청춘이란 이야긴가, 자리에 누워 한 시간여가 지나는데도 오히려 정신은 맑아진다. 그래, 잠이야 앞으로도 평생 잘 것인데...스탠드를 켜고 낮부터 읽기 시작한 책을 다시 붙잡는다.

매화를 너무도 사랑했던 이덕무는 매화의 짧은 생애가 하 안타까워 매화꽃을 만든다. 조촐한 가지를 만들어 화병에 담고 거기에 꿀벌의 집, 밀납으로 꽃을 만든 것이다. 꽃이 꿀을 만들고 꿀이 밀납을, 다시 밀납으로 꽃을 만드니 윤회매라 이름 지었다. 연암이 이덕무에게 배운 방법으로 윤회매를 만들어 팔았다.

“꽃병에 매화 열한 송이를 꽂아 팔아 돈 스무 닢을 받았소. 형수님께 열 닢 드리고, 아내에게 세 닢 주고,(형수님 열 닢과 아내 세 닢 사이에 시절이 보인다) 작은딸에게 한 닢, 형님 방에 땔나무 값으로 두 닢, 내 방에도 두 닢, 담배 사는데 한 닢을 쓰고 나니, 묘하게 한 닢이 남았구료. 이렇게 보내 드리니 웃으면서 받아주면 참 좋겠소”

이덕무는 그 한 닢으로 구멍 난 문을 발라, 올겨울 이명(耳鳴)도 나지 않고 손도 트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했다. 이런 글을 읽으면 울했던 마음이 환해진다. 가난을 초월한 삶이 보이고 정이 생기처럼 가득하다. 형제의 우애가 돈독하고 이타가 이기보다 출중한 시절이다. 친구의 지인이 올해 육십인데 암이 깊어 생사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한다.

복수가 가득 차서 사색이 완연한데도 여전히 경영하는 화원의 일을 놓지 못하고 일을 관리하면서 탐욕을 부리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죽음 앞에 서도 돈을 놓지 못하는 인생이라니, 같은 생명인데 살아가는 모습은 어이 이다지도 다른가. 여기쯤 살아왔으니 가끔은 선명한 답을 얻을 때도 되었으련만 여전히 삶은 안개 낀 새벽처럼 흐릿할 때가 많다.

내 삶을 내가 인정하는 것, 그 단순한 어법에는 수많은 우열의 사유가 포진하고 있다. 가장 낮은 그러나 즐겨(?)하는 다른 사람과의 비교를 제거해야 하며 나를 인정하듯 다른 사람을 인정해야 하며 그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듯 그 사람의 나와 전혀 다른 삶의 모습도 담담히 볼 수 있어야 한다. 갈증을 채우는 데 물 한잔이면 족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든 기억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평생 맹렬하게 책을 읽어왔다. 많이 읽은 사람 앞에서는 조족지혈, 그렇다고 깊이 있게 읽었다는 말도 아니다. 단지 그 방향으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 자체를 여가 행위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내 경우는 허전한 삶을 채우기 위한 일환이었다. 답 없는 문제 앞에 설 때,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묻고 싶을 때, 그리고 그 누군가에게 무엇인가 말하고 싶을 때.

묻고자 하나 답이 없다는 것을 알 때, 말하고자 하나 할 수 없을 때 책을 읽는다. 문제는 십자가 너머를 바라보는 힘이 없어서다. 예수님도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리네 삶에 십자가가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십자가 없는 인생 어디 있으랴, 그저 남의 눈에 보이고 보이지 않음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니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랑께> 그저 네 앞에 다가오는 매 순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살라는 사랑 어린 당부이시다. 그렇게 살되 남과 비교 하며 살지 말라는 뜻이 숨어 있다. 많은 사람의 고통이 여기에 상재되어 있다는 것을 수많은 심리학자가 다양한 언어로 설파하지 않던가, 좋아 보인다고 다 좋을까, 불쌍하다고 다 불쌍할까,

슬픔은 장마철 습기처럼 어딘가에 고여 있을 것이고 삶의 기쁨 역시 지하방 쪽문에도 들이차는 햇살처럼 스며들 것이다. 햇살 환하면 그늘이 짙다. 여명 밝아올 무렵이 가장 어두운 자연 현상은 어떤 깊은 철학이나 진리보다 단순명료하게 삶의 결들을 선명하게 비춰 준다. 무한 적용이 가능한 답이다.

<성근 그림자 맑고 얕은 물가에 빗겼는데/그윽한 향기 달 황혼에 가벼히 떠 일렁이네> 임포의 시다. 내게는 매화 향기가 느껴지는 데 아니라고 여긴다면, 우길 방법 없네. 그러나 거기 그 자리 딱 거기, 담박하되 싫증 나지 않는 삶이 내겐 보인다.
아랫녘에 홍매가 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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