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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無의 삶을 산 김용은 목사(4)김용은 목사의 생애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2.10.26 14:45
  • 호수 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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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용은 목사

이렇게 주경야독하며 출석한 복강교회에서 용은은 박태권 영수(오늘의 장로 역할)를 만났다. 용은은 타향살이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교회에 나가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구하며 눈물로 기도했다. 이 모습을 눈여겨 본 박태권 영수는 용은을 격려해주고 보약을 지어주며 의지할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용은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복강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스물셋에 집사가 되었다. 김용은 집사는 담임목사인 오택관 목사(제헌국회의원으로 친일파 처단 특별위원회 위원장 역임, 전 동아일보사 사장인 오재경의 부친)의 중매로 현숙하고 재능이 많은 처녀를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김 집사는 결혼할 당시 형편이 매우 열악하였다. 고학을 해서 공부를 하고 또 한 고향에 계신 어머니와 가족에게 생활비를 보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장인인 박태권 영수는 김용은 집사를 좋게 보았다. 박 영수는 찬양을 잘하는 예쁜 딸 박순임을 위해 오르간을 사줄 정도로 막내딸을 사랑하였다 (박순임의 음악적 달란트는 자녀에게도 이어져 큰딸이 경희대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둘째 딸도 연세대에서 오르간을 전공하였다).

박 영수는 혜안이 있어서인지 가난하지만 믿음직한 김 집사에게 딸을 맡겼다. 그리고 복강시에서 제일 큰 백화점에서 호화스럽게 결혼식을 열어 한인 사회에 칭찬할 만한 일로 회자(膾炙)되었다고, 당시 결혼식에 참석했던 박병선 장로(화곡교회)가 증언했다.

박태권(1877~1943) 영수는 어떤 인물인가? 한일합방 직전 전라도에서 고위벼슬(장중렬 박사는 전라감사였다고 증언)을 하다가, 나라의 독립을 생각하며 일진회(一進會) 타도에 앞장섰다. 박태권은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일진회원들을 색출하여 징벌하다가 대구까지 가서 싸우다가 다리에 부상을 입고 일본 적지에 들어가 살게 된다.

그곳에서 김치선 목사(대한신학교 교장 및 남대문교회 담임 역임)와 오택관 목사를 만나 장기적인 구국운동은 교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인재를 육성하는 것이라는 권면을 받고, 이들과 형제처럼 지내며 교회를 개척하고(이즈하라시와 복강시), 젊은 시절 배웠던 한의술로 약첩을 지어 가난하고 병든 교포들을 찾아다니며 전도하고 격려하였다.

1937년 회갑을 맞이했을 때는 아들이 준비해 준 많은 잔치 비용을 가지고 고국의 해남에 가서 고향 사람들을 전도하였다. 박 영수는 대마도 이즈하라시의 한인회 회장이었고, 그의 집은 한약방이요 성경공부방이었다. 그는 1943년 초봄에 오택관 목사가 고향인 황해도 옹진에 돌아갈 때 같이 이주하여 전도자의 삶을 살았으며 그 시기에 김 집사가 흥남으로 갈 때 사업 자금까지 지원했다.

그리고 주민들을 위해 야학(夜學)을 세웠는데 그의 헌신적이고 성스런 삶에 교인들과 주변 목사님들까지, 영수라 호칭하지 않고 ‘선생님’이라고 호칭하였다고 한다. 박태권 영수는 소천하기 8일 전에 스스로 떠날 것을 예감하고 이웃 사람을 한분 한분 불러 복음을 전했다. 소천하는 날은 하늘에서 집까지 서기(瑞氣), 구름 기둥이 내렸고 애도하는 만장(挽章) 깃발 153장이 상여의 뒤를 따랐다고 장중렬 박사는 ‘박태권 할아버지 추모집’에서 증언하고 있다.

훗날 김용은 목사는 “장인어른은 위엄이 있었고 지도급 인사들과 교우를 나누면서 지내신 분이었다. 예수님을 영접하신 후부터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하셨다.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사람에게 한약을 지어 찾아가 무료 치료를 한 후 전도를 하셨던 분이었다”고 회상했다.

◆ 함경도 흥남에서의 사업

김용은 집사는 1942년, 스물네 살 때 함경남도 신흥 공업도시인 기회의 땅 흥남으로 향했다. 이미 일본에서 넓은 세상을 경험했던 그는 사업에 눈을 돌렸다. 장인과 외삼촌의 격려와 재정 지원을 받아 아내와 첫돌이 갓 지난 큰딸 신자와 함께 흥남으로 가는 여객선에 올랐다. 김 집사는 대대로 내려온 가난을 끊고 아버지의 빚을 청산하고 어머니에게 기와집을 지어드리고 싶었다.

김 집사는 장인을 통해 소개받은 흥남의 천기리교회에 출석하였고, 외삼촌이 소개해 준 가타히로를 만나 안내를 받으며 교회 가까운 곳에 알루미늄 제품 제조공장을 시작했다. 천성이 부지런하고 집중력이 강하고 리더십이 있는 김용은 사장은 기대 이상의 호황을 경험했다. 흥남시 공업단지가 확장되고 시민이 늘면서 양질의 제품이 대박을 맞은 것이다.

아내가 경리를 보고 두 사람과 함께 시작한 사업이 점점 확장되어 직원이 열 명, 스무 명이 되더니 일 년이 지나서는 서른 명이 되었는데도 일손이 부족했다. 수입으로 들어온 돈을 푸대 자루에 담아 놓았다가 다음 날 은행에 입금시켜야 했다. 이 시기에 김 사장은 돈을 마음껏 세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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