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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표 목사, 호남 최조의 전킨선교사 연재(12)군산선교의 열매들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1.10.13 15:08
  • 호수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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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킨 선교사(1865년 12월 13일-1908년 1월 2일)

특히 군산선교부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만자산 교회(현 지경교회)는, 리더인 최홍서의 헌신과 사역을 통하여 기근이 들고 여러 어려움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으로 예배당을 헌당하게 된다. 그곳을 섬겼던 최홍서를 전킨은 이렇게 평가한다.

훗날 장로로 피택된 최홍서 씨는 군산 복음화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된다.

다시금 군산에서 선교 사역이 활발해진다. 1902년에는 77명이 세례를 받게 된다. 또한 드루의 후임으로 온 알렉산더(A. J. Alexander)와 다니엘(T.A.Daniel), 케슬러(Ethel Easter Kestler)가 의료 선교를 감당하게 되고 궁멀에 세워진 군산예수병원 역시 부흥하게 된다.

1903년 전킨은 불 선교사와 함께 군산선교부 내에 있는 교회들을 차례로 순회하게 된다. 남차문교회(현 남천교회)를 시작으로 송지동교회, 성말교회, 만자산 교회를 방문하며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성도들에게 세례문답을 하며 세례를 베풀게 된다.

군산선교부에는 162명의 세례교인과 65명의 세례지원자가 있었던 것으로 집계된다. 또한 1902년 하반기부터 1903년 상반기까지 1200장의 전도지, 1700권의 성경과 찬송가, 소책자, 그리고 5백 권의 신앙달력이 판매되었다. 게다가 남장로교 최초의 한국인 목사 후보가 나오기도 했다. 한마디로 ‘날로날로 부흥’하고 있었다.

영명학교

전킨은 복음 전도, 의료 선교 뿐만 아니라 교육 선교에도 힘쓴다. 군산의 남학교는 전킨 부인인 레이번에 의해서 1902년 모임으로 시작된다. 전킨의 서재에서 시작된 이 모임은 1903년 선교부에 의해서 전킨이 초대교장으로 임명되고 학교 운영이 공식화된다. 처음에는 군산의 남학교로 불러진 학교 모임은 화요일, 수요일은 하루 종일, 목요일은 오전에만 남학생에게 지리와 산수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가을부터는 단기선교로 온 유진벨 선교사의 두 명의 여동생들이 전킨 부인을 도왔고, 전킨도 가세하게 된다. 전킨은 영어성경과 구약성서역사 그리고 작문을 가르쳤다.

후에 체계가 더 안정되어 오긍선도 돕게 되고, 불의 부인, 불의 여동생도 함께 하게 된다. 이에 전킨은 선교부에 학교 건물을 위해 200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한다.

군산의 남학교는 정기적으로 25명 정도의 학생들이 출석하였는데 학교 운영 조건이 열악한 상태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증가하였다. 전킨은 이를 고려하여 선교부에 추가 지원을 강력하게 요청하게 된다. 먼 길을 오는 학생들이 머물 기숙사 건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후에 전킨이 전주를 떠나게 되었는데, 불의 부인인 레비가 군산 남학교 교사로 계속 활동하게 된다. 군산의 남학교는 1909년 학부의 정식 인가를 받아 “영명학교”(현 군산제일중고등학교)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영명(永明)이라는 뜻은 ‘영원한 빛’이라는 뜻이다. ‘영’은 요한복음 3장 16절의 ‘영생’에서 가져오고 ‘명’은 창세기 1장에서 명시된 ‘빛’을 의미한다.

이 영명이라는 이름에는 학교 설립목적을 선교와 개화 즉 교육에 두고 있어 학교 경영 목적이 장차 기독교계 지도자를 양성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말하고 있다. (제일중고등학교 100년사) 영명학교는 점점 더 활기를 띄게 되고 학생들의 숫자도 증가하였다. 학제는 보통과 6년, 고등부 4년으로 편성되었다. 성경은 모든 학과에 공통으로 교육시켰으며 세계사, 수학, 자연과학, 기독작문, 작문, 음악, 율동 및 체육 등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다.

일제가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교회가 운영하는 대부분의 학교를 폐쇄조치하게 되는데 충남 한산에 있는 한영서원 등 여러 기독교 학교들이 폐교되면서 많은 학생과 교사들이 영명학교로 몰려들게 된다. 이로 인하여 우수한 민족지도자들이 교사로, 학생으로 모이고 또 양성 되었다. 전킨이 세운 이 영명학교를 통하여 독립운동, 의료, 교육, 사회 사업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배출되게 된다. 또한 이들은 서울 이남 최초의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교육 선교를 통하여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 큰 역할을 감당한 것이다.

 

멜볼딘학교

전킨부인인 레이번의 선교 사역도 지속되었다. 레이번은 1902년 가을부터 1903년 3월 말까지 군산교회 주일학교 여자반을 맡아서 가르쳤다. 남자들은 전킨의 서재에서 모여 공부를 하였고, 여자들은 그 옆방에 모여서 레이번과 공부를 하였다. 이것이 멜볼딘여학교(현 영광여자중고등학교)의 시작이 되었다. 전킨 부인은 남자들에 비해 수학할 기회가 적었던 여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고 여러 가지 과정 뿐 아니라 정구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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