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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표 목사, 호남 최초의 전킨선교사 연재(7)초창기 한국사역 한국선교를 위한 준비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1.08.12 14:30
  • 호수 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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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킨선교사(1865년 12월 13일 -1908년 1월 2일)

두 선교사는 한국인 안내자와 함께 오전 9시부터 10시 반까지 밖에 나가 전도 겸 치료를 위하여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환자들과 함께 온 보호자들이 몰려들자 전킨과 그를 돕는 조사들은 바쁘게 일손을 놀려야 했다.
  그리고 진료 시간이 되면 드루는 한 사람씩 차례차례로 진료를 하였는데, 이를 통역하던 전킨은 지역민의 적극적인 협력에 놀라며 지난 날 전주에서 좋지 못했던 기억과 비교하며 감격하였다. 이렇게 군산의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이는 호남 최초 교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때마침 전킨 선교사의 전도 강연을 듣던 김봉래 씨와 송영도 씨는 예수를 믿겠다고 결심하고는 자신에게 문답을 허락해 달라는 요청까지 하였다. 그들은 후에 군산교회의 초기 멤버가 된다. 그 후 약 1개월 가량 군산에 머물면서 진료와 전도에 임하였다. 열심을 다해 그들을 돌보았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드루 의료선교사에게 진료를 받은 사람들은 감사의 표시로 생선, 굴, 김, 계란, 미역 등을 가지고 와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렇게 군산에 복음의 씨앗이 심겨지고 있었다,


  전킨과 드루는 30마일 떨어진 강경에서부터 고군산열도의 여러 섬들을 둘러보며 군산선교의 가능성을 저울질하였다. 군산 뿐 아니라 섬지역 선교도 계획하고 준비한 것이다.
  당시 군산 부근은 상업지로서 시장이 크게 발달하였다. 금강과 금강 지류인 무명천(현경포천)을 통해 만경, 강경, 서천 방면 이외에도 임피, 전주, 함열, 강경, 한산까지 폭넓은 상거래가 이루어졌다. 일본에 의해서 개항되기 이전부터 교통의 요충지로 충청도와 전라도의 사람들이 오고 가는 중요한 포구였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으로 인하여 군산은 전킨과 드루, 두 사람에게 적합한 선교지로 고려된 것이다.


  이후 전킨과 드루는 서울로 귀환하는데 그들은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관악산에서 함께 머물며 여름을 보낸다. 당시 서울에는 콜레라가 맹렬히 창궐하였다. 전킨과 드루는 정부의 요청을 받고 질병 구호에 나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위험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요청에 따라 그들을 도왔다. 조선의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았다. 전킨 선교사는 조선 정부로부터 콜레라 구호의 공로를 인정받아, 전킨 선교사의 이름이 새겨진 잉크 스탠드와 적십자 장식의 매트를 하사 받았다. 이 잉크 스탠드는 지금도 가보로 후손들에게 전해지고 있다.
  그렇게 여름을 보낸 전킨과 드루는 그해 9월 다시 군산으로 내려가 본격적인 선교를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드루는 한 달 정도 머문 후 상정했지만, 전킨은 좀 더 오래 있으면서 지난 봄에 이야기 했던 부지와 초가집 두 채를 매입하였다.
  
서울 서소문 사역 
군산선교를 준비하던 중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게 된다. 동학운동으로 인하여 선교사들은 서울 안에 발이 묶이게 되었고, 전킨 선교사와 드루 의료선교사는 쉽사리 군산으로 내려오지 못하게 되자 그곳에 머물러 1894년 6월 서소문 사역을 시작하게 된다.
  원하던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사실상 전킨의 첫 단독 목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서소문 자택 사랑방을 전면 개방하여 조선인들을 맞아들였다. 매일 열 명 안팎의 사람들이 그의 사랑방에 들려 그와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그 중에는 승려도 있었는데 기독교에 대해서 세 차례 공부한 후에 승려생활을 포기하고 주일 아침 평민복장으로 갈아입고 승려복을 반납하였다.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하자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전킨은 이 사건을 경험하며 상당히 고무된다. 조선에서의 사역에 대한 자신감도 얻게 된다.


  전킨의 서소문 사역은 드루의 가담으로 더욱 힘을 얻게 된다. 매일 같이 사람들은 전킨의 집에 몰려들었고 드루 선교사는 아픈 사람들을 진료하게 된다. 전킨은 진료받는 환자들을 위하여 통역하며 그 틈새를 이용하여 일대일로 전도하였다. 아직 한국어가 익숙치 않은 드루 선교사를 위해 일대일로 전도하였다. 아직 한국어가 익숙치 않은 드루 선교사를 위해 한국어를 통역하는 일이 잦았고, 자연스레 전킨의 한국어 사용 능력은 일취월장하여 상당한 수준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때의 사역으로 전킨은 조금 더 능숙하게 한국어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전킨의 ‘서소문 사역’은 단순한 전도 거점을 넘어서 신앙 공동체로 발전하게 된다.
  서소문에서 머물며 드루와 함께 사역을 할 때 전킨이 인도하는 첫 예배가 드려졌다. 어쩔 수 없이 머물게 된 서울에서의 생활이었지만 짧았던 시간 그 시간 동안 선교의 열매가 맺혀지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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