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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종표 목사, 호남 최조의 전킨선교사 연재(5)전킨의 교육환경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1.07.07 16:47
  • 호수 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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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킨 선교사(1865년 12월 13일 - 1908년 1월 2일)

“못할 것이 없는 하나님! 한국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답니다. 그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길을 열어주세요.”

그런데 어느 날 뜻하지 않게 미국 남장로교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선교에 대한 통지를 받게 되었다. 이 때 전킨은 몇 번이고 자신의 눈을 의심하면서 통지를 자세히 보았다. 확실하게 선교사로 선발되었다는 글귀가 역력하게 그리고 또렷또렷하게 담겨져 있었다.

놀라운 것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이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를 경영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도 아니고 일곱 명의 선교비를 전액 지원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 선교비 지원을 월 100불 500불이 아니라 왕복 교통비, 생활비, 자녀 양육비까지 거금이 소요되는 것이라 한 사람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데에도 많은 비용이 들기 때문에 한꺼번에 일곱 명의 선교사를 파송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성령의 감동으로 한국 호남의 예비된 구원받을 사람들을 위하여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이다 그런 우여곡절 끝에 전킨은 호남에 선교사로 파송받게 되었다.

전킨은 그 자리에서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를 세 번 외치고 그 자리에 엎드려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한참 동안 기도한 후 눈을 떴을 때 이미 해는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으며, 저녁 노을은 그렇게 장엄할 수가 없었다. 보통 저녁 노을은 잠깐 머물다가도 곧 없어져 버리지만 이날따라 저녁 노을은 장시간 계속되고 있었다. 참으로 장엄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는 기숙사로 돌아와서 만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외쳤다.

“ 나 한국선교사로 가게 되었어. 나를 위해서 기도를 부탁한다.”

“한국? 한국이 도대체 어떤 나라야?”

물론 당연한 질문이었다. 더구나 미국의 한 주 보도다도 작은 나라이기에 이름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후 전킨은 매일같이 한국선교에 대한 설계도를 만들어 갔고 이 소식을 부모님이 살고 있는 미주리 주에 알려야 한다면서 간단한 책가방 한 개를 챙겨들고 고향으로 달려갔다.

남장로교회 선교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먼저 선교하고 있던 그리스의 정치적 불안으로 인해 남장로교의 그리스 선교가 중단되고 새로운 선교지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언더우드 선교사의 형인 존 언더우드(John Underwood)가 한국선교를 위해 2천 불을 기부했다. 결국 선교본부는 전킨과 레이놀즈 그리고 테이트의 한국 선교 요청을 허락하게 된다. 한국선교의 꿈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1892년 1월 22일 선교본부로부터 ‘1892년 8월 한국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 라는 전보를 받는다.

한국으로 떠나기 위한 준비

전킨은 신학교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한국선교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먼저 워싱턴 앤 리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교제하던 메리 레이번과 1892년 6월 결혼식을 올린다. 동료인 레이놀즈도 1892년 5월 팻시 볼링(Patsy Bolling)과 결혼식을 올렸다. 레이놀즈 부부는 그 후 한국선교 현장에서 전킨 가정의 가장 절친한 동역자가 된다.

또 전킨은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몽고메리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전킨은 고향인 크리스천버그를 떠나 인근 렉싱턴과 시드니에서 대학과 신학교를 다녔지만 원적은 계속 크리스천버그의 교회에 두었기에 몽고메리 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던 것이다.

전킨과 레이놀즈 부부 그리고 테이트 외에 한국선교에 동참한 또 다른 두명은 테이트의 여동생인 메티 테이트(Miss Mattie Tate)와 버지니아 아빙돈(Abingdon)출신의 리니 데이비스( Miss Linnie Davis)였다.

후에 ‘7인의 개척선교사’(Seven Pioneer)라고 불리우는 이들은 1892년 미주리 세인트루이스에서 만나, 그곳의 센터를 장로교회와 그랜드 애비뉴 장로교회가 주최한 환송예배를 드린 후에 남장로교 한국 선교 선발대로 빅토리아 호를 타고 한국 땅을 밟게 된다.

이들이 이후에 조선 선교를 위해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생명을 다바쳐 뿌린 복음의 씨앗이 오늘날 호남 지방에 엄청난 열매로 나타났으니 호남의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그들에게 깊이 감사해야 할 것이다.

7인의 남장로교 개척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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