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21.4.16 금 22:51
상단여백
HOME 독자기고 특별기고
1920년대까지 R. J. 도마스 선교사의 사역에 대한 인식 형성과정 고찰(10)선교사 토마스 목사에 대한 이해
  • 이은선 박사(교회사)
  • 승인 2021.04.01 19:05
  • 호수 511
  • 댓글 0
이은선(안양대 신학과 교수 및 교목실장). 출처: 위키백과

Ⅳ. 오문환의 토마스 목사 관련 저술과 기념위원회 조직, 기념교회 설립(1926-1932)

그리고 3,000통의 서신을 미국과 영국에 보관된 외교문서, 선교회문서 등 국내외 관계 문헌들을 열람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1928년에 『도마스 목사전』을 출판하였다. 그는 토마스 목사의 학창시절부터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기술하고 2차에 걸친 조선여행과 최후 순교장면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오문환은 마펫 선교사와 같이 토마스가 한국에 와서 복음을 전한 첫번째 선교사라는 것을 강조한다. “더욱이 新기독교의 목사 聖職을 가지고 우리 따를 밟아보기는 도마스 목사가 맨 처음이다. 그가 전파한 복음으로 말미암아 신자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가 전파한 복음으로 신자가 생겨나기 시작하여 한국교회가 시작되었다. “基督新敎가 그 후 20여 년간이나 頓挫상태에 잇셧으나 거금 42년전 甲申에 다수한 선교사가 다시 도래함으로 금일의 성황을 呈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예수 교회는 이 조선에 첫 선교사 이 新敎의 첫 순교자인 토마스 목사를 위하야 금년에 침묵할 수가 업슬 것이다”라고 하였다. 토마스 선교사가 처음으로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하여 신자가 생겨났다가 정체 상태에서 다시 선교사들이 들어오면서 교회가 부흥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순교가 밑거름이 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순교가 한국교회의 밑거름이 된다는 표현은 같은 해 출간된 차재명의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에서 “시(是)난 아(我) 예수교(敎)의 파종(播種)한 의혈(義血)이라 위(謂)하리로다”에서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교회사가 김수진은 “그(오문환)가 토마스 선교사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토마스 선교사가 평양에서 순교함으로 평양이 복을 받고 결국 조선이 복을 받게 됐다는 사실에 감격했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한다.

오문환이 토마스 목사의 순교를 강조하는 데는 일부 천주교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로마가톨릭은 김대건을 포함하여 1839년과 1846년에 살해된 79명에 대해 1925에 시복식을 거행하였다. 이러한 가톨릭의 시복식에 대해 기독교도 1866년까지 거슬러 올라가 토마스를 순교자로 만들어 오랜 전통의 기독교 순교자의 반열에 서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한 측면이 있었다. 이미 1915년에 그의 죽음을 천주교 신부의 죽음과 연결시킨 것은 존스 선교사였다. 그렇지만 장로교회에서 그 이전에 그의 죽음에 대해 전혀 순교로 인식하지 않았는데, 가톨릭의 시복식에 영향을 받아 오문환이 개인적으로 그를 순교자로 만들어냈다는 것은 필자가 생각하기에 논리적으로 설득력이 약하다고 판단된다. 오문환의 그러한 주장이 선교사들과 한국장로교회에 수용될 수 있던 것이 그 이전부터 그러한 인식을 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일본이 1925년에 남산 신궁을 만들어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기독교의 급속한 성장력의 배후에 토마스의 순교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일본 신사참배에 저항하도록 격려하고자 하였다. 최상도는 그의 죽음 60년과 성서공회 30주년 기념식의 일치가 중국어성경을 한 군인에게 주었다는 순교장면으로 이미지화 했을 수도 있다고 지적한다. 고무송은 1926년 급속하게 성장하고 있던 장로교 총회에서 오문환의 저술이 좋은 반응을 얻었는데 “한국교회가 내적으로는 결속을 다지기 위해 힘을 모으고, 외적으로는 일제에 대항하기 위하여 전체 교인들의 힘을 결집할 수 있는 영웅을 필요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므로 토마스의 순교에 대한 강조는 한국교회에게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게 되었고 그 이후 그가 토마스 선교사 순교기념사업을 강력하게 펼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순교기념사업회의 두 번째로 중요한 사업은 기념교회를 건립하는 일이었다. 1927년 5월 8일에 수천명의 기독교인들이 그의 유해가 매장되었다고 믿어지는 쑥섬에서 열린 토마스 선교사 기념예배에 모였다. 대동강의 남쪽 둑 근처에 성장하는 조왕교회가 있었는데 이 교회의 새로운 건물이 토마스 기념교회로 명명되었다.

1927년 16회 장로교 총회에서 토마스 목사 순교 기념위원 오문환이 10분간의 언권을 얻어 도마스 선교약사를 설명하였고, 10월 마지막 주일에 토마스 목사순교기념사업에 대하여 연보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다음 해에 600달러가 헌금되었다고 보고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이은선 박사(교회사)  dsglory3604@nate.com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좋아요 0

이은선 박사(교회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