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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교 정체성의 뿌리를 찾아서(20)김상준 편 - 한국성결교회 창립자 김상준의 생애와 사상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21.02.17 14:52
  • 호수 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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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운 박사 (교회사)

본지 논설위원.전 성결대 총장, 교수

                   Ⅰ. 김상준의 생애

“朝鮮 敎會 初時代에는 時代가 時代인 만큼 說敎할 때에 半傳道, 半演說體로 卽, 하나님의 말삼도 傳하려니와 國家를 爲하야 民族을 爲하야 雜同散異로 말하여야 說敎를 잘한다고 하고 單純한 眞理로 罪와 義와 審判만을 말하면 異端이라고 別名을 부치는 때 이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사역에 함께 하셔서 권능을 베푸셨다. 시대적 감각(時代的 感覺)이 없는 전도 방법이라 하나, 천루(賤庵)한 방법을 통해서도 이들의 전도로 인하여 구원받은 영혼들을 경향간(京鄕間)에 더하게 하셨다.
  이들의 전도는 경성(京城) 시내 각 교회 교인들에게 호기심을 발동(發動)케 하여 구경삼아 복음전도관에 들어오게 하였다. 구경삼아 한번 발을 들여놓은 이들은 김상준의 은혜넘치는 설교를 듣고 모두 감복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

“처음에는 엇더한 생각으로 왓던지 와서 본즉 建物의 華麗한 것도 업고 의식의 嚴壯한 것도 업스나 김상준씨의 靈力으로 충만한 설교와 明晳한 眞理的 聖經 講義와 은혜의 實驗的 干證을 듯는 사람은 누구던지 다 그 진리 됨을 認定치 아니할 수 업섯고 그 은혜를 사모치 아니할 수 업섯더라.”

 당시만 해도 서울의 대부분 교회는 선교사들이 설교를 주로 하여 한국인 설교자는 드물었는데 그의 설교는 능력이 있어 평판이 대단하였다.
 특별히 1908년 겨울에 성령의 큰 역사가 일어나 온 경성(京城)에 있는 교회의 교역자들과 선교사들까지 참석하여 기도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죄를 통회 자복하고, 중생(重生)의 은혜와 성결의 은혜를 받고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손바닥을 치며 찬미가(讚美歌)를 부르고 굴레를 벗은 송아지 같이 뛰는 오순절(五旬節, Pentecost)의 대역사가 일어났다. 이것은 정빈과 김상준의 사역하는 곳에 바로 인접한 연동장로교회의 부흥에 도화선이 되었고, 급기야는 당시 연동장로교회를 이끌어 갔던 조사(助事) 이명헌(李明憲), 집사 원세성(元世性), 배선표(裵善均), 여조사인 원경신(元敬信) 등이 성결교회로 이명하는 일이 일어났다.
 1911년 3월에 이단과 속화의 인본주의적 사상을 대적하여 진리를 사수하고자 하는 목적과 자체 교세의 증가, 그리고 지도자 양성을 위한 필요성의 대두로 인해 경성 무교정(武橋町) 복음전도관 안에 임시로 성서학원을 열게 되었다. 성서학원 초대 원장에는 토마스(John Thomas) 조선 감독이 맡았고, 교수에는 정빈, 통역에는 이장하가 맡아 10여명의 남녀 학생들에게 2년 동안 집약적(集約的)인 성서교육(Intensive Bible Training)을 실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912년 3월에는 서대문 건너편에 놓인 ‘험한 농장(Precipitious Farm)'이라 불리는 죽첨정(竹添町) 3정목 35번지(현 충정로로서, 이곳은 애우개 마루턱으로도 불렸다)에 신축 중이던 성서학원이 완공되자 봉헌식을 거행하고 성서학원을 이전하게 되었다. 이로써 성서학원은 교실, 교수, 재정 면에서 발전의 일로에 서게 되었고, 남녀공학제(男女共學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에 지금까지 무교정 복음전도관 주임 교역자로 있던 정빈이 완전히 무교정 복음전도관을 사임하고, 성서학원의 교수직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따라서 부교역자로 동역하던 김상준은 정빈에 이어서 무교정 복음전도관의 제2대 주임 교역자가 되어 그 이듬해인 1913년까지 시무하게 되었다.

조사 이명헌은 1914년 한국성결교회 최초로 목사안수받고1922-1928년까지 경성성서학원 교수로 사역함


 김상준은 1914년 4월 22일에 이장하, 강태온(姜泰溫), 이명직(李明植), 이명헌(李明憲)과 함께 한국성결교회 최초로 목사 안수 (牧師 按手)를 받았다. 목사 안수 받은 지 5개월이 지난 9월 30일에 정빈과 무슨 이유인지 모르나 서로 의견이 충돌하게 되었다. 정빈은 성서학원 강당 칠판(漆板)에 김상준에 대한 12개 조문(十二個 條文)을 기록하고 킬보른 총리에게 송사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킬보른은 칠판에 쓴 것을 취소하고 서로 주 안에서 화해하는 것이 좋다는 중재안을 가지고 정빈을 권하였다. 김상준이 정빈에게 찾아가 용서를 청하였으나, 정빈은 송사에 대한 판결을 요구하며 이 일이 관철되지 않자 사직서를 제출하고 북간도(北間島)로 떠나가고 말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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