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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최 선 박사의 창문 칼럼(13)최초 외국인 총장 · 장애인 교육의 선구자
  • 최 선 박사(Ph.D., Th.D.)
  • 승인 2020.05.13 19:02
  • 호수 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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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서울극동방송국(FM106.9MHZ) 매주 수요일 오후 4시 30분 ‘5분 칼럼’ 진행자

낡은 승합차로 출퇴근 하며 대학교 스쿨버스를 손수 운전하시고 총장의 월급은 물론 외부 특강료까지 모두 대학교에 헌납했으며, 평소 몸에 밴 근검절약과 소탈한 습관 덕분에 학생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 대화하고 김치찌개를 가장 좋아하신 다정한 모습의 파란 눈과 하얀 머리카락을 갖고 있던 ‘국내 최초 외국인 총장’이자 ‘장애인 교육의 선구자’로 불렸던 나의 참 스승 나사렛대학교 명예총장(미국명, William H. Patch 월리엄 패치·78)을 소개하고자 한다.

월리엄 패치(백위열 전 총장)박사는 1942년 미국 매사추세추에서 출생하였다. 뉴욕 로체스터대학교에서 상담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대한민국이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웠고 새마을 운동이 한참 불붙기 시작할 때인 1973년 10월 31세 나이에 부인 백경희 사모(미국명, 게일 패치·73)와 함께 나사렛성결교단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패치 부부는 미혼모가 버린 남자아이(캐빈)를 입양해 미국 메릴랜드대학교를 졸업시키고 미국인과 결혼을 하여 어엿한 성인으로 성장시킬 정도로 한국에 대한 애정을 키워왔다.

“김포공항에 내려 처음 마주친 황량했던 당시 한국의 첫인상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는 그는 “이렇게 빨리 한국이 발전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천안과 한국은 패치 총장에게 제2의 고향이며, 대학교에서 미래를 꿈꾸는 젊은 학생들을 위해 언제든지 좋은 멘토 역할을 해주고 싶다”고 말하였다.

백위열 명예총장은 1997년부터 2005년까지 대학교에서 선교사로 38년 동안 재직하면서 대한민국에서 청춘을 다 보냈다. 특히 그는 장애인 교육신장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교육과 선교에 에너지를 쏟았다. 총장이지만, 학교 내의 7평의 게스트 룸에서 부인과 함께 생활했다.
그의 부인(게일 패치)은 나사렛대 영어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53개국으로 유학생을 배출하였다. 월리엄 패치는 한국말을 능숙하게 구사하지만 “한국말이 가장 어렵다”고 말했다.

한국인보다 오히려 더 한국을 사랑했던 백 명예총장은 “38년간 한국에 살다보니 내 몸에 흐르는 피 가운데 절반은 한국인의 피가 됐다”며 “남은 삶도 한국인으로 남아 귀국 이후에도 한국을 자주 오가면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월리엄 패치 총장은 미국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장롱을 비롯해 한국 냄새가 나는 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미국에 보낼 작정”이라면서 “섭섭한 마음도 있지만 나사렛대학교가 이만큼 성장하고 한국 사회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성숙해지고 있는 만큼 매우 뿌듯한 마음을 안고 떠난다”라고 말했다.

한국에서 일궈낸 대표적인 일 중 하나가 장애인 교육을 신장시킨 것입니다. 월리엄 패치 총장은 뇌성마비 장애로 태어난 딸을 8개월 만에 천국으로 보냈던 아픔을 되살려 나사렛대학교를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재활복지특성화대학으로 만들었다. 대학교 총장 부임 후 학교의 최우선 학사행정을 장애인 교육에 두기로 결심하고 전국 최초로 대학교 부설 특수 유치원과 초등학교 과정을 개설했다.

1996년에는 국내 대학교 가운데 최초로 장애인 입학전형을 실시했다. 당시 국내 대학교들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일로 장애인들이 대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것이었다. “장애학생은 있어도 이들을 교육하는 데 장애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월리엄 패치 총장의 지론이었다.

그는 "지역 이해를 바탕으로 세계를 향한 비전을 가지고 준비해 나가는 것은 지구촌 시대를 사는 젊은이들의 특권이자 의무라 생각했다. 세계를 바라보는 안목을 기르고 모험을 실천한다면 세계는 여러분들에게 무한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입니다."라고 젊은이들에게 강의를 하였다.

또한 그는 "한국사회의 민첩성과 역동성은 다른 나라 국민이 흉내 내기 어려울 정도이며. 결국 이런 국민성이 성장 동력으로 작용하는 것 같아요."라며 요즘 젊은이들이게 민첩성과 역동성에 창조성을 더해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지구촌으로 나아가라고 말했다.

1973년 새마을 운동이 한참이었던 우리나라에 31세의 젊은 나이로 부인과 함께 선교사로 이 땅을 밟은 월리엄 패치 전 총장의 사역을 생각해 보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과 선교사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경제 원조를 받았던 우리나라를 이제는 외국에 굶주린 국가에 베푸는 나라로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셨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교회 성도들도 받는 것에 익숙하기보다 장애인과 소외된 이웃을 생각하며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기독교 언론, 방송사들처럼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앞장섭시다. 나의 세계관을 넓히고, 모험을 두려워하지 말고 세계를 향해 도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월리엄 패치 총장의 삶을 통해 지식과 우정을 나누고 세계평화와 발전에 대한 나눔을 실천한다면 급증하는 지구촌 분쟁과 빈곤문제 해결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임을 기억하며 남은 생애를 길과 진리와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소중한 사역자로 살아가자.

최 선 박사(Ph.D., Th.D.)  smse2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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