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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 (연재)가을이 깊다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19.11.14 10:58
  • 호수 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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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영 작가

푸념은 커다란 목소리가 아니다. 한숨처럼 새어나오는 작은 언어다. 스쳐 지나가도 될 만한 거라면 푸념化 되지 않는다. 말은 생각과 느낌이라는 제법 긴 터널을 지나오기 때문에 그 터널 안에서 멈출 수도 있고 삭힐 수도 있다. 멈추지도 못하고 삭혀지지도 않은 채 결국 나타나고야 마는 푸념은 작은 소리라 애달프고 혼잣말이어서 외롭다. 글은 마음을 포쇄하는 일인데 어쩌면 푸념 역시 그럴 수도 있겠다. 포쇄는 주로 청명하고 바람 좋은 봄가을에 길일을 택해서 했다. 벼슬이 제법 높은 사람이 흑단 옷을 입고 책고에 절을 한 뒤 책방 문을 열고 책의 먼지를 털어냈다. 책 사이사이로 햇살을  알현시킨 다음 책갈피마다 닥종이를 한 장씩 넣고 다시 기름종이로 싸고 천궁과 창포를 넣었다. 문득 나도 그러면 어떨까, 내 관이나 유골함에 창포나 천궁을 넣는 거. 영혼이야 살아온 과정이 문제이니 천궁 창포 함께 한다고 하여 무슨 없던 격 있어지겠는가마는 남아 있는 아이들에게 혹 우아한 기억으로 연상되지 않을까 “울엄마 당신의 마지막에 창포와 천궁을 넣어달라고 하셨어. 엄마는 식물을 엄청 좋아하셨는데 식물로 된 수의를 입고 싶으셨던 것일까.” 스토리 시대니 아이들에게 엄마의 마지막 스토리 하나 남겨주는 것을 생각해 보았다. 별거 아니지만 그런 의식적인 행위로 인해 별리가 분위기 있어질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갈수록 죽음에 대한 눈이 많아진다. 이러다가 어느 순간 그와 아주 친한 친구가 될지도 모른다. 푸념이다. 
 기실 나는 회색분자다. 진보 앞에 가면 진보인척 가만히 듣고 보수 앞에 가도 보수인척 가만히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거침없는 삿대질이나 삿대질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이념이나 가치 같은 거대 담론 앞에서만 회색분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의 사안 앞에서도 색깔이 없다. 아니 없으려고 애쓴다.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은 마치 계절과 같다. 공존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공평한 저울과 접시저울은 여호와의 것이요 주머니 속의 저울추도 다 그가 지으신 것이니라.’ 잠언의 말씀은 공평은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이라는 선언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공평은 <다름>위에 세워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깊은 사유도 필요 없는 예증이 바로 우리의 얼굴들이다. 추가 우리에게 없다는 것은 우리에게 공평을 아는 지혜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내게 옳은 것이 남에게도 옳은 일이겠는가, 지혜는 자신의 들보를 보는 것이라는 글을 어디선가 읽었는데 마치 올베쌀(찐쌀)처럼 음미할만 하다. 회색은 매우 우아한 색이다. 우아함은 선명함이 없을 때 가볍게 나타나는 그림자 같은 현존이다. 지나친 밝음과 선명함속에 우아함은 깃들기 쉽지 않다. 성정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호오가 분명한 사람, 붉고 푸른  감정의 격랑이 얼굴에 잘 나타나는 사람은 우아하지 못하다. 그러니까 생명이 오가는 일 아니라면 그냥 스쳐 지나갈 것, 가능하면 가만히 있을 것, 사람에게서 위로를 얻으려 하지 말 것, 무심한 나무를 더 많이 바라볼 것, 색깔이 선명한자들 앞에서 하는 색깔 없는 자의 푸념이다
 어젯밤 산책할 때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나뭇잎들이 우수수 져 내렸다.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가로등 불빛은 저물어가는 단풍들에 마지막 색을 입히고 있다. 모든 사라지는 것들에게 부여된 참혹한 아름다움이라고나 할까, 지기 위해 저다지도 아름답게 변하다니, 흔하디흔한 느티나무도 하늘을 여백 삼은 듬성한 나뭇잎들이 얼마나 어여쁘던지,  느티나무 세 그루만 중문 안에 심으면 세세부귀를 누린다는 이야기도 있다. 느티나무 세 그루를 포용할만한 땅이라면 당연히 부자겠지, 라는 해석은 삭막하다. 느티나무 새순을 보고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 봄에 새순이 돋을 때 일제히 싹이 돋으면 豊, 그렇지 않으면 凶. 그런데 저 수많은 이파리들이 설령 일시에 돋지 않는다 한들 일시에 돋는 것처럼 보이지 않겠나. 너무나 이파리들이 많으니까. 그러니 길흉을 점치는 것 보다는 그냥 희망을 본 게 아닐까, 이런 깊은 가을에는 더불어 소멸의 아름다움을 볼 것이고. 혹시 그렇다면 저 나무의 푸념이 아름다운 단풍일수도 있겠네. 
 어쩌면 푸념은 누군가의 긍정적 동조를 필요로 하는 부정의 언어일 수도 있겠다. 무엇인가를 베어내거나 도려내지도 못하면서 아픈 무딘 칼날 같은 것, 타인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겨누는 회한일수도 있으리.  만추의 푸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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