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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여행4첫 표적(요2:1-11)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19.09.05 16:55
  • 호수 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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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광성 목사(송현성결교회)

요한복음의 기자인 요한은 공관복음의 기자와는 달리 다른 전승을 바탕으로 성경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요한복음은 공관복음과 내용이 약간 다르기 때문이다.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생애를 전기적으로 소개하려는 성격이 강한 반면에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대한 신학적인 변증과 해석을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요한복음은 철학을 기독교신학에 도입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말씀(logos)이라고 설명하여 만물의 원천으로 소개하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몸에서 피와 물이 나왔다는 설명도 가현설(Docetism)을 반박하는 철학적인 설명이었습니다.
1. 기사와 이적과 표적
     표적(Sign)이나 이적(Wonder), 또는 기적(Miracle)은 주로 같은 상황에서 등장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행적을 다루는 4복음서에서 이 용어들은 거의 비슷한 용어처럼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적과 기적은 비슷한 말로서 놀라운 행적을 묘사하는 용어지만 표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적이나 기사는 보통 인간이 할 수 없는 일, 또는 자연법칙을 넘어서는 초자연적인 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신 일이나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신 일과 같은 일들은 모두 기사 또는 이적입니다. 이러한 이적이나 기사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성 놀라우신 위엄 등을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표적은 다릅니다. 표적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이 말하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입니다. 요한복음에 표적으로 번역된 헬라어 <세메니온>은 “군호, 징조, 기사, 표적, 기적, 이적”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표적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인간의 이해의 한계를 초월한 기이한 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 기적이 보여주려고 하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입니다.
     표적이라는 말은 사건은 사건대로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한 초자연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그러나 표면에 나타난 의미보다 더 큰 내면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내시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본문11절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믿게 하려고 이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표적은 깨끗하고 순수하고 분명한 언어입니다.
2. 문제 많은 인생
     가나의 혼인자치가 벌어졌는데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당시의 혼인은 신랑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잔치 집에서 가장 중요한 포도주가 모자랐습니다. NIV에서는 <바닥이 났다>고 번역하였습니다. 혼인잔치는 계속되고 있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든 인생에는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물질의 문제와 질병의 문제와 관계의 문제들이 있습니다.
    포도주가 떨어진 문제는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사사로운 일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께 문제를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문제부터 우주적이 문제까지 예수님께서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사9:6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만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3. 순종의 은혜
     마리아는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하인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5절에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대로 하라>는 말은 헬라어로 단순과거 명령형인 <포이에사테>입니다. 시중드는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보여야 할 의무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고 사리에 맞지 않는다 할지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말고 즉시 행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하나님의 은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을 하셨습니다. 정결예식용 항아리를 채우게 하고 그 물을 떠다 주라고 한 것은 연회장을 기만하는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그 말씀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 말씀에 거역할 수 없는 권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자연도 굴복하는 영적 권위가 있습니다. 권위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 믿음으로 순종할 때 문제가 해결되고 풍성한 은혜가 넘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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