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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영 사모의 "편지" (연재)길 가득 온통 그늘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19.07.31 15:48
  • 호수 452
  • 댓글 1
                  위 영 작가

만로음滿路陰, ‘길 가득 온통 그늘’이라는 아름다운 단어가 있어요. 다산이 백운동 별서 정원을 다녀온 뒤 백운동의 12곳 명소를 초의 선사에게 그리게 하고 자신은 시를 지은 백운첩에 나오는 단어이죠.  백운동의 그윽한 아름다움이 학자를 시인이 되게 했어요. 그중 이경인 산다경은 별서정원을 향하여 가는 길에 있는 동백나무 그늘숲을 일컫는데 만로음이 나와요.
 이리 아름다운 단어를 만나면 허공 속에 길이 생겨 마치 그 길을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들어요.   
 보성군 문덕면에 있는 대원사 가는 길은 왕 벚꽃 나무가 길 양쪽에 가득 차있어요.  한쪽으로는 크지 않는 천이 고요히 흐르니 벚꽃 잎 난분분 질 때면 어허, 입을 닫게 하는 풍경이죠. 허나 그 순간은 언제나 그러하듯 매우 짧아요. 모든 아름다움은 극도의 허무 속에 피어나는 꽃이라고나 할까, 아름다움은 주체가 아니라  대개 사람이라는 객체의 것으로 마치 꽃처럼 ㅡ사람의 감정과 흡사하여ㅡ허망하기 그지없다는 것에 그 의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해요. 하지만 꽃이 다가 아니죠. 꽃이 지고 난 후 거기 가득 만로음이 펼쳐져요. 빛이 들이치지 못하는 그늘이 생겨나는 거죠. 나뭇잎 향기가 짙어지고 진초록 향기는 사람의 몸에 배어들죠. 
 만로음을 생의 그늘이라고 하여 고뇌가 걸어가는 길이라고 생각해봄직 해요. 사유, 그늘, 고통, 고독과 침잠의 강이 흐르는 만로음. 성정이 부박한 나 같은 사람은 솟아나는 만로음은 없다할지라도 대원사 가는 길, 그 깊은 만로음 속에서 어디 이런 아름다움 있으랴 하며 멜랑콜리커가 되기도 했어요.
 금호 아트홀에서 말러의 연주회가 있었어요. 엄마의 취향 까지 알아서 챙겨주는 최고의 소울 메이트. 나의 벗 내 딸 덕분이었어요. 말러가 16살에 작곡한 말러의 피아노 사중주는 겨우 한 악장이었어요. 우수어린 한 멜로디가 마치 날개달린 여신처럼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녔어요. 저 아래 첼로의 음부터 시작해서 피아노 고음까지 아우르더니 다시 저 맨 아래 피아노의 저음까지 마치 섭리처럼 거침없이요.
 말러의 선율은 악기를 깨우고 사람을 깨우고 다시 저 먼 나라로 혼자 떠나는 어둑신하고 고요한, 그러나 지극히 서정적인 소리의 나그네였어요. 그의 음악은 나의 저 깊은 곳, 어딘가에 깊이 숨어있던 고독한 자리를 찾아내더군요. 내안의 낯선 어느 부분의 존재를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처음 느끼게 되었어요. 모짤트의 음악들이 아름다움에 젖어 눈부시게 빛난다면 구스타프 말러는 세상에, 16살에 그는 만로음을 알았던 것일까요. 
   40여년이 넘게 미국에서 살아오신 지인께서 그러시더군요. 무슨 채널을 틀어도 한국말이 나오는 것이 너무 행복하다고, 그리고 지하철이나 버스를 탈 때 다 똑같은 사람들 곁에 있으니 눈에 띄지 않아서, 아무데나 숨을 수 있어서 너무 편안하다고,  우리에게는 너무나 사소해서 보이지도 않던 것들이 그분의 눈에는 감사고 행복이더군요.
  한향림 옹기 박물관에 갔어요. 커다란 독에 거꾸로 된 하얀 버선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요.  버선 그림은  아이가 세상에 태어났을 때  금줄처럼 조심하라는 의미도 있고 맛을 헤치는 귀신이 버선 속에 들어가서 못나오게 한다는 주술적인 의미도 있었다고 해요. 주술 보다는  해학 아닌가싶었지요. 벌레를 방지하는 뜻도 있었다는데 실제 다족류 벌레들이 흰 한지가 반사하는 빛을 싫어한다고 해요. 아, 정말 만로음 같은 그 지식은 어떻게 알아냈을까요?  혹여 맛이 사라진 장이라면 다시 버선발 신고 돌아오라는 당부의 의미도 흥미로웠어요.  <푸레독>이란 옹기도 있더군요. 푸레독은 색이 검고 푸르스름하여 푸레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해요. 궁중에서 임금님의 쌀을 담아 놓은 ‘어미(御米)독’으로 사용되었고 마지막 구울 때 생솔을 가득 넣고 밀폐시켜 숲의 검댕이가 독 속으로 들어가서 숯이 지닌 정화작용을 할 수 있다고 해요. 길 가득 온통 그늘처럼 서늘한 이야기더군요. 
 이런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독이 편리함에 묻혀 사라져버리고 화려한 만큼 자연에 위해한 그릇을 사용하고 있죠. 이제 우리는 작고 소박하게 단출하고 자연친화적으로 살수 없게 된 걸까요? 너무 멀리 온 걸까요?  
 기실 만로음은 꽃처럼 환한 젊음의 단어는 아니죠. 고요한 침잠의 언어로 사람의 배면을 느끼게 하는 성찰의 언어에요. 
 문득 생각해보니 눈부시지 않는 남은 길보다 지나온 길이 더 오랜 지금이 만로음 아닌가,
 당신께 주하로 들어가는 시절에 여름 안부를 여쭙는 글이 길었습니다.

기독교헤럴드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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