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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지도자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 ( 31 )독립운동가, 성서학자, 기도의 용사 김응주 목사
  • 김헌곤 목사
  • 승인 2019.06.26 14:49
  • 호수 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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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헌곤 목사(문준경순교기념관장)

김응조는 경상북도 영덕군 지품면에서 출생하였다. 그가 14살이 되던 1910년, 일제는 이 나라를 송두리째 앗아갔다. 이러한 때에 마침 서울에서 내려와 “구국이 곧 기독교 수용”이라는 애국지사 최봉희의 말에 감동되어, 김응조의 부친인 김원섭은 5명의 가족과 함께 교회에 입교하였다. 김응조의 신앙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대구 계성학교를 거쳐 1917년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한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김응조는 경성성서학원 대표로 만세 운동에 참여하여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출옥 후 성서학원을 졸업한 그는 강원도 철원교회, 경기도 광주경안교회, 안성교회, 아현교회에서 사역한 후 1926년 목사안수를 받았다. 김응조는 그 해 북선지방회 감리목사에 임명되어, 함경남북도, 강원도 북부, 북간도 전체를 책임지게 되었다. 당시, 성결교회 5개 지방회 가운데 하나인 북선지방은 북간도 용정 등 15개 처에 불과했다. 그러나 김 목사의 부임 후 5년 동안에 40개교회로 증가되는 등, 북선지방회의 교세 신장은 놀라웠다. 그런데 몸을 돌보지 않고 사역에 힘쓴 탓에 병을 얻었다. 이에 요양 차 따뜻한 남쪽의 목포교회(현 북교동교회)에 1929년 7월에 부임한다. 그러나 병이 가중되어 죽음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마지막 선택으로 죽기를 각오하고 유달산에 올랐다. 매일 2시간씩 기도하던 중 30일 만에 놀라운 신유의 복음을 체험하게 된다. 그는 목포교회에서 순교자 문준경을 기도의 사람으로 훈련시켰고 신학공부를 하도록 권면하였다.

 

그는 도서지방 전도에 열정을 다하던 중에 총회본부에서 그의 건강 회복 소식을 듣고, 그를 1931년부터 1936년까지 호남지방회(충청도, 전라도) 감리목사로 임명하고 대전교회에 주재케 하였다. 그는 호남지방회를 맡아 사역하는 중에 신개척 39개소, 교회당 건축 36처소, 신자의 증가 4,000명이라는 결실을 맺었다. 또한 그는 1936년 4월 독립문교회를 담임하며, 중부지방회(서울, 경기도, 강원도) 감리목사로 사역하였다. 그후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잡지 「생명지광」을 발행하며, 1953년까지 성결교회 전임부흥사로 활약하였다. 1956년에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제 11대 총회장으로서 성결교단의 발전에 공헌을 하였다. 그후 1961년까지 서울신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하였다.

 

1961년 제16회 교단총회에서 NCC와 NAE 두 기관에 대한 동시 탈퇴 안이 보류되어 이월됐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오히려 양 기관에 더 많은 대표를 파송하자 양 기관 탈퇴를 주장하던 김응조는 동조자와 함께 ‘복음진리동지회’를 조직하고 ‘예수교대한성결교회’를 분립하였다. 1962년 9월에 성결교신학교(현 성결대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에 취임한다. 그는 뛰어난 성서학자로 성서대강해(24권)를 비롯하여 67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김응조 목사                1921년에 세워진 경성성서학원에서 교수

영암(靈岩) 김응조 목사의 제자들은 그를 기도의 용장으로 불렀다. 그는 격동과 전환의 한 세기의 한국사와 운명을 같이하며, 한평생 복음만을 외치며 ‘성서대강해’를 남기고, 후학을 양육하고 한국 성결교회 신학과 사상을 심화, 확장하는데 큰 역할을 감당했던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1977년12월에 독립 유공자 대통령 표창 받았다. 그는 90대에도 건강하게 사역하다가 1991년 96세에 주의 부르심을 받았다.

김헌곤 목사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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