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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과 한국교회 <1>개혁신학적 이해(1)
  • 김영한 교수
  • 승인 2019.04.12 12:55
  • 호수 440
  • 댓글 0
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숭실대 명예교수

머리말

올해 대한민국과 한국교회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이하고 있다. 3·1운동은 백년 전인 1919년 3월 1일 한국인들이 거국(擧國)적으로 일제 강점에 저항해서 대한민국의 독립과 한국민이 자주국민임을 선언하고,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역사적 사건이다. 당시 한국인 유학생들은 영자(英字)신문을 통해서 파리강화(講和)회의,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같은 정보를 입수하여 3주 전인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의 YMCA회관에서 2.8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내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광수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를 기폭제로 해서 일어난 불씨를 다듬어서 육당 최남선이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하여 민족대표 33인 이름으로 선포하고 급작스러운 서거(逝去)를 한 고종황제의 장례일(3월 3일)을 계기로 하여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I. 3. 1운동의 역사적 의의

1. 3.1운동의 모태는 중국 상하이의 신한청년당의 여운형과 김규식 독립운동

3.1운동의 모태는 일제의 감시가 심한 국내보다는 활동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국제정세에 대응이 신속한 중국 상하이에서 준비되었다. 평양신학교를 중퇴하고 장로교회에서 전도사를 지낸 여운형이 1차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는 국제 정세변화에 부응하여 독립운동의 기회가 주어져졌다고 보고 중국 상하이에서 1918년 8월에 신한청년당을 결성했다.

1918년 11월 11일 1차세계대전이 종결되자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파리 강화조약에 중국을 참여시키기 위해 중국 정부에 보낸 특사(特使) 찰스 크래인(Charles R. Crane)이 한 연설회에서 파리강화회의에서 전후 식민지 처리문제가 피억압민족의 의사를 존중해서 처리될 것이라는 내용이 전달되었다. 이 연설을 들은 신한청년당 대표인 여운형은 크레인을 방문해서 일본의 한일합방이래 일본 경찰의 한국인에 대한 잔인한 억압을 알리고, 파리강화회의에 한국인 대표 파견하여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발표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크레인은 적극적인 협력을 약속했다, 이에 고무된 여운형은 김규식을 한국대표로 파리에 파견할 것을 결정했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선교사 가문에서 자라났으며,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언더우드가 설비한 새문안교회의 장로로 봉직하다가 105인 사건으로 중국에 망명해 있었다.

김규식은 1919년 2월 상하이에서 파리로 출발하면서 신한청년당원들에게 국내에서 일제의 학정(虐政)을 폭로하고 독립선언을 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내가 파리에 파견되더라도 서구인들이 내가 누군지 알 리가 없다.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고 선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해야 한다. 파견되는 사람은 희생당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사건이 발생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다.”

김영한 교수  chd62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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