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 : 2019.6.11 화 16:58
상단여백
HOME 독자기고 특별기고
토요시평사랑과 용서
  • 배치영 목사
  • 승인 2019.01.10 15:39
  • 호수 431
  • 댓글 0
배치영 목사(두란비전신학연구원 원장, 본지 논설위원)

 

기독교의 정의는 ‘사랑과 용서’이다. 그 주된 내용이 성경이고 그 주체와 객체는 신과 사람이다. 신적 사랑과 용서는 삼위 일체적 공의 속에 녹아 있는데 그 역사는 성부와 이스라엘 백성이며 본질적 적용은 성자와 유대민족이다. 

장차 이루어질 약속의 백성은 복음을 접하고 수용하는 전 인류의 선택된 이방인들이며 이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며 돕는 역할은 성신 즉 성령이시다. 삼위 일체적 신의 섭리를 통한 ‘사랑과 용서’가 현실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어떻게 가르치고 요구되는가?

첫째, 사랑의 태동은 무엇인가?

1. 사랑의 기원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 사랑은 하나님의 본체이다(요일 4:7).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 중에 피조물 사람도 가지고 있는 공유적 속성의 근원이며 뿌리이다. 사람들이 범죄 전 순수했던 사랑은 신과의 공유로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그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되었기에 신의 사랑이 고스란히 선유되었다(범죄 이후 공유적 선유된 사랑이 변질되고 깨어지고 잡다한 변형적 형태와 단어들로 파송된 것이다: 미움, 시기, 질투, 다툼, 비판, 저주…). 

하지만 결국은 변질된 신의 사랑이 파국적 멸망의 사망에 이르게 된다. 사랑은 근원과 태동이 신의 소속이요 하늘나라의 소유물이다. 사랑을 통해 창조의 문이 열리고 이차적 관계가 성립되며(요일 1:6) 모든 만물의 에너지를 발산시킨다. 한마디로 천하 만물의 운행적 섭리에 사랑 없는 모든 활동은 무의미적 기계적 운동일 뿐이다(요일 4:7).

2. 사랑의 속성

사랑은 행위적 표현으로 나타나는데 사랑의 속성은 불쌍히 여기는 ‘긍휼’하심이다(욥 33:24). 신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창 1:2) 중에 만물을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으로 창조하셨다. 여기에 신의 긍휼하심이 내면속에 잠재되어 있었다. 사랑의 창조의 시작은 신의 창조 순서나 세밀함을 통해 긍휼하심을 사랑의 창조로 승화시킨 것이다. 

만약 신의 긍휼이 없었다면 사랑의 창조는 실족의 대가로 심판 속에 신의 섭리가 계속성을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창 6:5-7).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이것이 깨어진 창조를 사랑으로 신의 긍휼적 속성이 범죄한 인류에게 다시 소생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준 계기이다.

3. 사랑의 의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요일 4:9)’ 하나님 사랑은 배려와 관심, 케어(care)로 나타난다(잠 8:17). 사람의 사랑의 절정도 어머니가 자식에 대해 깊은 염려와 관심과 배려로 나타난다. 또한 사랑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부모는 자녀에 대해서 책임을 지고, 선생은 학생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또한 부름에 응답하는 것이 사랑이다. 

책임(responsibility)이라는 말은 ‘respond’ 즉 ‘대답한다’라는 말에서 유래 되었다. 책임을 진다는 것은 상대방이 부를 때 대답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상대방을 존경(respect)하고 존중한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자기중심의 이기주의자가 아니라 상대방을 존경하고 존중하는 이타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내 생명처럼 상대방의 생명도 존중하고 그의 개성을 아끼고 인정해주며 그의 권리와 자유와 의사도 존중하는 것이다. 사랑은 무엇보다 상대방을 이해(understand)하려고 해야 하며 상대방의 처지와 형편을 감안하여 그로 인한 불안과 고민도 함께 해야 한다. 따라서 사랑은 이해를 심화시키고 이해는 사랑을 심화시키다. 깊이 사랑하면 깊이 이해하고 깊이 이해하면 깊이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사랑의 정의의 활동성에는 ‘사랑은 주는 것(giving)’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무엇이든지 주고 싶고 주게 되는 것이다. 나의 시간을 주고, 돈도 주고, 정성도 주고, 애정도 주고, 모든 것을 주므로 반사 이익의 기쁨이 나에게 깃드는 것이다. 이것이 사랑의 논리요, 사랑의 신비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

둘째, 용서의 행위는 어떻게 일어나나?

1. 용서의 기본적인 개념은 무엇인가? 

신약성경에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사랑의 하나님은 십자가의 관문을 통해 사죄의 은총을 베푸시는데 그로 인해 사람의 마음과 생활을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한 용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여 깨닫게 되고 어두웠던 눈이 밝아져 용서받기 전의 자신을 먼저 발견케 되며 돌 같았던 굳은 마음과 교만적 반역적 성품이 새로워짐을 용서의 과정으로 결론적 새사람을 입게 된다. 구약성경의 하나님 역시 자비의 하나님이시다. 

시편 51편의 다윗의 참회 시처럼 용서를 간구하므로 그가 맛보는 새로운 소망은 용서받은 자만이 느끼는 희열이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시 51:12)’. 

하나님의 용서는 그가 친히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몸과 같이 상함을 받으시고 꺾임을 받으셔야만 했다. 그로써 우리 인간들에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암묵적인 가르침을 요구하신다.

2. 용서의 심성적 발효는 무엇인가? 

기독교는 용서와 화해를 기초로 시작한다. 성경에 용서란 말은 나를 포기하는 말이요, 그 조건은 회개와 속죄에 있고, 더 깊은 의미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존한다. 

용서의 효력은 두 사람 사이의 화해요 그 이상의 높은 차원은 십자가에서 성취되었다. 용서는 위하여 주는 것이요(forgive), 완전히 잊어버리는 것이요(forget), (저주, 원한, 악담, 반목, 질시, 시기를) 포기하는 것이다(forsake). 

용서의 동의어가 사랑이기에 사랑은 기독교의 대명사요 전부요 또한 표현이다. 탕자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사랑,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제2의 기회를 주신 예수님의 자비, 수제자의 배반과 저주를 알면서도 세 번이나 다짐하면서 회복시키신 구세주의 인자하심과 ‘형제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고 한 사도 요한의 사랑은 명백하게 기독교의 특징으로 크리스천들의 용서와 심성을 가르치고 발효적 생활을 요구한다.

3. 용서로서의 행위적 삶은 어떻게 실천하나? 

용서는 적극적인 행위로써 미래를 잘되기 위해 과거를 취급하는 방법이다. 용서는 새로워진 관계를 나타내며 성장의 약속을 동반한다. 용서는 죄 씻음과 동시에 새로움으로 가득 차는 것이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용서를 한다면 그것이 용서하고 받는 일에 선수를 치는 것이다. 상대방이 용서를 빌어올 때 손에 들었던 손도끼를 놓아 버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안하다는 말을 절대로 하는 법이 없는 불쾌한 친구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할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께서 어떻게 우리를 용서하셨는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가 잘못을 시인하고 사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분은 스스로 먼저 착수하셨다(롬 5:8). 

누구든지 이런 사랑과 용서를 받으면 변화가 있게 된다. 성 바울이 그의 위대한 사랑 찬가에서 ‘사랑은 앙심을 품지 않는다(고전 13:5)’고 했을 때, 그 말은 사랑하기 위해서 먼저 성격이 고쳐져야 하고 지난 일도 부정에서 긍정으로 바뀌어야 하며, 단점보다 장점에 관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인간관계를 오래 지속시키려면 과거에 살지 말고 현재에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상대방을 넉넉하게 용서코자 한다면 우리는 자신에게 너그러운 만큼 남에게도 너그러워야 한다. 

결론적으로 ‘용서한다! 용서한다! 용서한다! 나는 오늘부터 내게 해를 끼친 타인을 모두 용서한다’라고 스스로 결심하고 스스로 의로워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내가 그들의 불의 불신 부정을 이해하고 분노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또는 그들을 책망하지 못해서도 아니다. 하나님이 내게 용서해 주라고 말씀으로 명령하셨기 때문이며 내게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또한 내가 용서함으로 내 하나님 명령에 순종했음을 스스로 만족스럽게 신앙적 성취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 만족감은 희열, 평안, 평화, 안위로 내 삶을 긍정적이고 소망적으로 승화시켜 준다. 용서가 없는 삶은 사랑이 소멸되며, 평안이 전무하다. 용서는 내 심령이 건전해지는 데 필수 조건이다. 또한 사랑과 용서는 창조적인 힘을 주며 과거의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고 복수의 연쇄 반응에서 해방시켜 준다. 

사랑은 용서를 촉진 시키고 용서는 화해의 기회를 제공하므로 새로운 삶을 진척시키므로 다 같이 죽지 않고 다 함께 잘 사는 행복의 길이다. 이것이 크리스천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다.

배치영 목사  im@cherald.co.kr

<저작권자 © 기독교헤럴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좋아요 0

배치영 목사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