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일은 내게 또 다른 상처가 되었다. 이젠 고인이 되신 큰형님 집에 얹혀 살던 당시의 기억들은 마치 내가 집안의 구박덩이가 된 것 같았다.
나와 나이 차가 많이 나던 큰형님은 막내 동생인 내게 유독 차갑고 인색하였다. 조카들은 항상 용돈이 두둑한 지갑을 가지고 다녔지만, 같은 집에 살던 나는 길거리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었다.
한 번은 조카 아이 수학 공부를 봐주다가 손바닥을 가볍게 때렸는데 이 사실을 안 큰형님께 다짜고짜 주먹으로 얻어맞아 한참 동안 기절했던 일도 있었다. 큰형님 앞에만 가면 폭력에 대한 본능적인 두려움과 분노가 겹쳐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괴로웠다. 청년 시절의 나는 마음 한 켠에 늘 아버지와 큰형님을 미워하는 마음이 있었다.
중학교 때까지는 성적이 제법 전교에서 순위권에 속했었지만, 고등학교에서는 학교 공부도 쉽지 않았다. 전교에서 자타가 공인하는 공부벌레였음에도 불구하고 미리 선행 학습을 하고 온 학우들에 비해 나는 요령도 실력도 부족했다. 결국 원하던 대학에 합격하지 못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입대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 그때 입대를 기다리던 몇 달 동안 나는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였다.
한창 우리나라 교회들이 성령체험을 기치로 내걸고 있던 터라 나도 교회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성령의 은사 체험을 열렬히 추구하였다.
당시 여러 영적인 은사들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자주 산기도를 다니며 각종 방언은 물론이거니와, 병 고치는 은사나 귀신 내어 쫓는 은사 등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런 영적인 경험들 직후여서 그랬는지 영적 불모지인 군대에 입대하고 나서도 한동안은 신앙을 지키는 데 있어 크게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하사관으로 차출되어 삼하사관 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난 뒤였다. 병들에게 가혹하게 군기를 잡지 않는다는 이유로 도리어 내가 자주 구타를 당하게 되었다.
나는 크리스천의 윤리와 성품을 지키면서 도저히 군대에서 요구하는 명령을 수용할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아무리 선하게 대응하려 해도 선으로 악을 이길 수는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신앙이 실생활에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감이 몰려 왔다. 당시의 경험을 통해 아무리 초자연적인 신앙 체험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면 신앙을 지키기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죽음을 불사하고 믿음을 지켰던 선진들은 어떻게 그런 견고한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단 말인가.
군대에서 바뀌지 않는 상황들을 계속해서 겪으며 나는 심지어 ‘하나님이 정말 계시는 것 맞나’ 하는 의심까지도 들었다. 한 번 마음에 의심을 갖기 시작하니 그 동안 내가 쌓아온 신앙이 한 순간에 무용지물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후로는 군대에서 아무도 나를 얕보거나 괴롭히지 않도록 무지막지하게 체력을 단련하는 것을 우선 목표로 잡게 되었다. 밤마다 뒷동산에 올라가 양손에 5 파운드짜리 아령을 들며 근육을 키웠다.
심지어 강하게 보이기 위해 크리스천에게 금기사항이었던 술, 담배도 거절하지 않게 되었다. 내 의지로 강하게 되고자 노력하니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제법 두려워할 만큼 다부진 체격과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강한 내가 된 것이 좋았다. 그렇게 하나님 없이도 내 의지로 뭐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제대 후 강화된 의지력으로 이전에 실패했던 대학 입시를 다시 준비하기 시작했다.
곧 나는 대입 전문 학원 종일반에 들어가서 주일에는 겨우 예배만 참석하며 하루 종일 공부에만 매달렸다.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공부를 제대로 해보겠다고 주님 앞에 선언하기도 했다. 실제로 성적이 많이 올랐고 학원에서는 유망주로 불렸다. 그러나 웬걸. 학력고사 전날에 희한하게도 잠이 오지 않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다음날 시험을 평소 성적과는 영 딴판으로 망하고 만 것이었다.
결국 뜻하던 바와 다르게 후기 대학에 붙게 된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한다. 당시에 내 힘만으로 살겠다고 제멋대로 강짜를 부렸을 때 만약 결과가 좋았더라면, 일이 잘 풀렸더라면 이후의 내 모습이 어떠했을까. 아마 그 뒤로는 기고만장하여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기보다는 어찌하든지 모든 일에 내 힘으로 살아보려고 했을 것 같다. 그랬다면 지금과 같은 신앙을 갖기는 절대 불가능했으리라.
<다음호에 계속>

김명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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