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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문-기정도 목사친구여, 우리 어떻게 만날까?
  • 기독교헤럴드
  • 승인 2013.08.2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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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을 위한 ‘나와 그것의 만남’이 아니라 존중하는 ‘나와 너의 만남’
교단 친구를 ‘마키아밸리즘’ 아닌 ‘성령주의자’로서 사랑의 만남 소망

유대인 철학자 마틴부버는 그의 저서 “나와 너”에서 모든 참다운 삶은 만남 이라고 정의 합니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요한복음 1장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느니라”를 “태초에 행위가 있었느니라”고 각색 했고, 키에르케고르는 “ 태초에 권태가 있었느니라”고 했지만 마틴부버는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를 “태초에 관계가 있으니라”고 정의 합니다. 부버는 만남, 관계, 그리고 대화의 철학자라고도 합니다.

나와 그것의 만남=이익을 위한 만남

부버는 만남을 나와 그것의 만남이 있다고 합니다.
이 만남은 상호 인격적 조우가 아니라 생명이 없는 무 인격적 해후를 말합니다. 만남을 상호 인격적 존재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경쟁 관계나 이용 가치의 대상, 그것(Es), 즉 나를 위한 도구적 존재로 나의 이익을 위한 수단적 존재로서의 만남을 말합니다.
카인과 아벨이 있었습니다. 사울과 다윗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가롯 유다 등이 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왕조 이방원과 정도전이 있습니다. 단종과 수양 대군이 있습니다. 남이장군과 유자광이 있습니다. 영조와 사도세자가 있습니다. 이 외에도 이승만과 김구 선생이 있고, 박정희와 장준하가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미국과 이라크가 있고, 영국과 아일렌드, 독일과 유대인, 이북과 이남, 한국과 일본이 있습니다. 이러한 나와 그것의 만남은 나의 이익만을 위하여 시기, 질투, 살인,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마키아밸리즘=‘피치 못할 비윤리 수단’ 주장

역으로 독일의 사회학자 퇴니스는  이익 사회와 국제계약 관계에서는 국익에 따라 모든 일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나와 그것의 만남은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프랑스 파스칼의 팡세에서의 정의론은 이런 사실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다수에 복종 하는가? 그쪽이 올바른 사람이 많기 때문인가? 그렇지도 않다. 힘이 많기 때문이다. 올바른 자를 따라가는 것은 바른 일이며, 제일 강한 자를 따라가는 것은 부득이한 일이다. ‘힘이 없는 정의는 무력하고, 정의 없는 힘은 폭력이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언제나 악인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를 수반하지 못한 힘은 공격을 받기 마련이다. 그래서 정의와 힘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자를 강하게 만들고, 강한 자를 올바르게 만들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의 예로 이스라엘은 구약 성서를 근거하여 팔레스타인 영유권을 주장하고 거기에 거주 하던 주민들을 내어 ?고서는 이스라엘을 건립 하였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 합니까? 국제 법을 초월한 국가의 힘입니다. 이 말을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  이라고 합니다. 마키아벨리즘은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단이나 방법도 허용된다는 국가 지상주의적 정치사상. 이탈리아의 정치가이자 정치 이론가인 마키아벨리가 그의 저서 《군주론(君主論)》에서 처음으로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때에 따라 비윤리적인 수단을 쓰는 것도 어쩔 수 없다는 사상입니다. 이런 사상을 지닌 자를 마키아벨리스트 (Machiavellist)라고 합니다.

성령주의자=냉정 종식

저는 한국에서 마카이벨리스트가 아닌 Holy Spirit(홀리 스피리트)가  나왔으면 하고 고대 합니다. 일본과 이북의 자물쇠를 복음으로 풀 수 있는 성령 받은 홀리 스피리트가 나왔으면 합니다. 본 교단과 산하 각 기관에도 Holy Spirit가 나왔으면 합니다. 성령 없는 정의와 힘은 인간과 사회를 파괴 시킵니다.

나와 너의 만남

아름다운 만남이 있습니다. 이 만남은 나와 그것의 만남이 아니라 나와 너의 만남이라고 합니다. 김춘추의 ‘꽃’이라는 시를 소개 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빛 길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이 시는 모두 가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주체와 대상 이라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상호 주체적 만남의 관계인 실존 철학을 노래합니다. 서로 인정 하며, 서로 사랑하는 주체적 만남이 이루어지는 그 순간 꽃이 되는 것입니다. 꽃은 개체로서의 자아를 인격체로서의 자아로 만드는 향입니다. 꽃은 홀로 고립된 자아를 상호 아름다운 만남을 맺은 사회적 자아로서의 꽃이 됩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인격적 만남의 예

공자와 안회라는 스승과 제자의 만남이 유교로 발전 되었습니다. 간디와 네루의 만남이 인도 해방을 이루었습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만나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고, 잔인함에 폭력적이었으며 저속하기까지 했던 알렉산더가 훌륭한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위대한 학자를 스승으로 모셨기 때문이다. 괴테와 실러의 우정 어린 만남에서 독일 문화의 금자탑이 세워졌습니다. 조선 세종과 황희의 만남으로 조선 왕조의 전성기가 펼쳐졌고, 아론과 모세의 만남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 되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만남으로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 다윗 가계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인류 구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
아름다운 만남 이뤄

진실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아름다운 만남의 금자탑을 이룩합니다. 부루너는 모순 속의 인간 이라는 저서에서 인간은 이성적 (창조) 인간과 실재적 인간(죄)의 사이에 있는 모순적 존재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만남에 있다고 했습니다. 이 만남은 하나님은 주체가 되고 내가 객체가 되는 이분법적 만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내가 인격적인 결단과 반응과 헌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서로 주체가 되어 사랑하는 헌신이 있습니다. 그 헌신을 통하여 내가 남을 존경하고, 인정해주고, 높여주는 아름다운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친구여, 우리 어떻게 만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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